깨달음의 서

이전과 이후

무아 신타 (無我 神陀) 2021. 2. 22. 11:03


이전과 이후


깨달음에 관한 책이나 영상 등을 보게 되면 분별 이전, 생각 이전 또는 부모미생전 父母未生前이니 하며 무엇무엇 이전이라는 표현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전의 상태를 상상하거나 거기에 이를 수는 없으며, 단지 지금 이후의 상태를 경험하거나 거기에 이를 수 있을 뿐입니다. 분별이나 생각 이전의 상태에 이를 수는 없으며, 지금 이후의 상태를 상상하거나 거기에 이르는 것만이 가능합니다.

달리 얘기하자면 정에서 반을 거쳐 합이 되는 것이지, 반에서 반 이전 상태인 정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내가 태어나기 이전이든 아니면 부모가 태어나기 이전이든 관계없이, 우리는 언제나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해서 갈 수 있을 뿐입니다. 이는 계곡에서 강으로 흘러온 강물이 계곡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으며, 오직 바다를 향해 흘러갈 수 있을 뿐임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표현이나 경험도 자연 이치에 맞게 서술이 되어야지, 오히려 거꾸로 분별 이전이니 부모미생전이니 하는 표현은 될 수 있으면 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서, 과거 수백 년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재해석 또는 깨달음에 관한 과거 선사들의 기록이 가지는 권위에 매달릴 게 아니라, 자신이 지금 체험한 사실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과거 선사나 선각자에 대한 일부 얘기는 마땅히 인용할 수 있으나, 아예 대놓고 지금부터 천년도 더 지난 중국 춘추전국시대나, 당나라 또는 송나라 때 쓰인 책을 무슨 깨달음의 교과서인 양 펴놓고 공부하는 것은, 과거 조선 시대에 공자의 사상을 추앙하여 사서삼경을 공부하던 행동과 다를 바 하나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때는 그 시절에 맞는 비유일 뿐이므로 지금은 지금 시대에 맞는 예를 들어 설명해야지, 천년이나 지난 옛날에 쓰인 책에 나오는 일화를 들어 설명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가르침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스스로 서지 못하고 공자의 권위에 기대어 섰다면, 오늘날의 많은 선지식 역시 자신의 경험에 기대어 스스로 서지 못한 채, 여전히 노자 또는 불교의 조사 등의 권위에 기대어 서 있는 꼴입니다. 깨달은 사람이라면 스스로 서야 할 것이며, 성인이나 조사 또는 스승의 등 뒤에 숨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석가모니도 임종 시에 자등명과 자귀의를 가르치셨습니다.

자신의 깨달음에 기대어 서야 합니다. 자신의 깨달음이 밥이 되어야 하며, 과거 선현들의 기록은 반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깨달음에 있어서 자만이란 당연히 경계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겸손 역시 경계의 대상일 뿐입니다. 깨달음에 있어서 겸손과 예의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것은, 자신의 깨달음이 분명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자등명 하다면 자귀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말씀도 자등명 법등명이며 자귀의 법귀의입니다. 나 자신을 등불로 삼고 그 다음 세상에 있는 진리를 등불로 삼아야 하며, 나 자신을 의지로 삼은 다음 세상에 있는 진리를 의지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오히려 세상의 진리나 성현 또는 스승의 가르침에 기대어 서는 어리석음을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적어도 스스로 깨달았으며, 깨달음에 대한 얘기를 하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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