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신神의 사랑

신타나몽해 2021. 4. 9. 03:24

신神의 사랑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 라는 명제는 인간은 왜 두려움을 느끼는가, 라는 주제로 대치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거나 악한 게 아니라, 무언가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때 즉 평온할 때 우리는 한없이 선하게 행동하지만, 반대로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는 그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음입니다.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독일인과 인디언 학살을 벌인 미국인 등 모든 학살의 배후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근원을 없애고자 하는 동기에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구도 타인을 죽이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으며 심지어 동물의 생명까지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을 때 우리는 살인조차 서슴없이 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이 어떠냐는 논쟁은 초점이 빗나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선설이나 성악설이 아닌 백지설에서처럼,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위험을 느끼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죠. 거기에 부수하여 권태로움 역시 불안과 똑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평온한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될 때 인간은 위험을 느낄 때와 똑같은 행동 양상을 보이곤 합니다. 권태로움에서 파괴적인 충동을 느끼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 인간은 평화를 지향하면서도,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될 때 때로는 전쟁의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것이 국가와 같은 조직이 아닌 개인의 경우에는, 선善을 추구하면서도 때로는 악행에 대한 충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체나 생활에 위험을 느끼는 때는 물론이려니와, 반대로 아무런 위험이 없는 상황이 반복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행동에 대한 충동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인류의 숙제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종교와 이른바 성인의 가르침은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하라는 것이었습니다만, 인류 역사를 보더라도 이러한 가르침은 그리 신통한 처방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종교에서 그들이 신봉하는 신의 이름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지경이니 무엇을 더 말하겠습니까?

그래서 최근 대세를 이루는 듯한 영성 분야에서는 종교에서의 주장과는 달리, 권선징악이 아니라 「지켜보면 사라지고 저항하면 지속된다」 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신과 나눈 이야기, 닐 도널드 월시 지음)

예의 '신과 나눈 이야기' 책에서는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것을 주문합니다. 심지어 타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그를 살해하는 게 정당한지에 대해서 자문해보라는 내용이 나와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기독교 바이블에 나오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 는 구절과도 일맥상통하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과 신체에 대한 불안감이 우리를 주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영원할 뿐이며, 육체란 생명이 잠시 깃들어있는 유기체임을 분명히 자각한다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자신이 바로 생명임을 자각한다면 우리에게 두려울 일은 없습니다. 우리 몸이 생명인 것이 아니라 몸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몸속을 자유롭게 들락달락할 수 있는 생명이 곧 우리 자신임을 확연하게 깨닫는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영생하는 존재입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존재라는 증표입니다. 사는 동안 행한 행동이 어떠했는지에 따라 영생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이미 영생의 존재이기 때문에 이렇게 지구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지구상에 이렇게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영생은 증명된다고 할 것입니다.

죽음이란, 태어남과 똑같이 여행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태어남 이후 삶이라는 기차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면, 죽음 이후에도 다시 삶이라는 기차를 타고 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죽음 이후가 깜깜하다면 삶도 깜깜한 것이며, 삶 이후가 환하다면 죽음도 환한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란 왕복승차권 각각에 이름 붙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승차권 이름에 불안해 할 필요는 하나도 없습니다. 삶과 죽음 모두가 삶이라는 기차표의 이름이니까요.

몸이 아닌 우리 자신인 생명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젠가 썩어없어질 몸이 아니라, 몸에 잠시 깃든 생명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세요. 우리는 언제라도 몸에서 벗어나, 죽음이라는 또 다른 태어남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삶의 문 뒤에서 보면 그걸 죽음이라고 부르지만, 문 앞에서 보면 우리는 그걸 태어남이라고 부릅니다. 즉 태어남과 죽음이란 동전의 앞뒷면처럼 동일한 것입니다.

조금 깊은 내용일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 자신인 의식을 우리가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생명 또는 의식이라고 이름 붙이고 개념을 가질 수는 있으나, 그것을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눈이 눈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의식이란 저절로 의식되는 것입니다. 의식을 우리 스스로 의식할 수는 있지만, 의식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 수 없는 의식을 느낌으로 느낄 수는 있습니다. 이게 바로 자신의 본성을 본다는 뜻인 견성이며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식을 느낌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깨달음 이후에는 추구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알 수 없어서 답답한 마음에 그토록 오랫동안 추구해왔던 자신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입니다.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할 일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제 경험으로는 견성 즉 깨달음이란 마지막 시작일 뿐입니다.

더 이상 추구할 게 없다는 의미에서 마지막이지만, 의식에 대하여 느낌으로 알았다고 해서 그게 끝이 아니기에 시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사실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의 시작일 따름입니다. 의식이란 어느 순간에 펑 하고 터지는 팝콘이나 튀밥과 같이, 그리 단순한 게 아니라 계속 알아가야 할 무엇입니다. 마지막 시작이지만 끝이 없는 시작인 셈이죠.

의식을 의식하고 깨달음을 거쳐 느낌을 통해 알게 되기도 합니다만, 우리의 의식이란 곧 신神이기도 합니다. 고로 신. 생명. 의식이란, 동일한 무엇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여기서 '무엇'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 대신에 '것'이라는 표현을 쓰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신. 생명. 의식 등에 대하여 어떠한 상이나 개념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 생명. 의식이란 쉽사리 알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깨달음 이후에도 계속 알아가야 할 무엇일 뿐,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주장은 어림없는 착각일 뿐입니다. 깨달음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붓다도,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 이후에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칩니다.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부터, 깨달음을 타인에게 전할까 말까 하는 망설임 등등 말입니다.

유대교에서부터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이르기까지 신에 대한 많은 정의가 내려지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정의는 종교지도자에 따라 그리고 시대와 지역에 따라 계속 바뀌어 갑니다. 이처럼 신은 무엇이라고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우주 전체이자 텅 빈 침묵입니다. 그러한 신을 중세 로마 제국 이전 시대부터 지금까지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는 각기 자신들만의 신을 주장하며 자신들이 믿는 신만이 옳다고 고집합니다.

그들 모두가 유일신을 표방하는데 왜 그들은 서로 싸울까요? 유일신이라면 그들이 믿는 신은 모두 같을 터인데 말입니다. 이게 바로 종교와 종교인의 참모습입니다. 모든 종교인이 진리와 정의를 외칩니다만, 그들이 믿는 종교가 진리이며 정의라고 주장할 뿐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한국에서는 불교와 천주교 지도자들이 아집 또는 아상을 조금이나마 버린 모습을 보이는 정도입니다.

정리하자면, 내가 믿는 것만이 진리이자 정의라는 아집과 아상으로는 평화를 얻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개인적이든 종교적이든, 국가적이든 또는 세계적이든 말입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생명이란 유형의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무형의 영성적인 것임을 깊이 자각해야 합니다. 육체란 하나의 씨앗과 같이 땅에 묻힌 다음 썩어 없어지지만, 생명이란 솟아오르는 새싹과 같은 것입니다. 영원히 이어지는 무엇입니다.

우리는 영원합니다. 육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지금과 같은 느낌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몸이 없지만 있는 것과 똑같은 느낌으로, 지상에 살 때 인연 맺었던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몸은 지상에 남아 화장되거나 땅에 묻히지만, 무형의 영적 상태에서도 우리 삶은 계속 됩니다. 사후세계는 지상에서보다 지극히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임을, 말기암으로 사후세계를 경험한 아니타 무르자니 여사 등 많은 임사체험자들이 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영원한 생명임을, 그리고 유형•무형의 우주 전체가 텅 빈 의식 안에서 생멸하는 것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에게 두려움이 더는 친근한 대상이 아닐 것입니다. 옆에 늘 붙어있기에 멀리 떼어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며, 두려움으로부터 도망다니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두려움조차 '나'라는 '텅 빈 의식' 안에 있는 부분임을 뚜렷하게 자각한다면 말입니다.

두려움이란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별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사랑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조차도 우리가 품어안아야 합니다. 사랑뿐만이 아니라 두려움까지도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존재와 모든 사건이 나를 위해 존재하고 나를 위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단 하나!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달라집니다만, 믿음은 각자의 자유의지에 달린 일입니다. 무엇을 믿느냐를 두고 신神이 상과 벌을 줄 것이라는 상상은, 시대에 뒤떨어져도 한참 뒤떨어진 망상입니다.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느냐가 전적으로 자유의지에 달린 일인데,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신이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상을 주고 벌을 준다면 이게 정상일까요?

정상이든 정상이 아니든 이 또한 우리 각자의 믿음일 뿐입니다. 믿음이 자신의 길을 정하며, 믿음이 바로 우리 앞에 나있는 길입니다. 다만 신에 의한 상을 기대하지 말 것이며, 벌을 상상하지도 말라는 충고를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든지 신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100마리 양 중에서 제 멋대로 가다가 길을 잃은, 1마리 양조차 버리지 않는다는 비유가 기독교 바이블에 나와있지 않나요?

우리가 길을 잃거나 잘못된 믿음을 가져도 우리는 언제나 신의 사랑 속에 있음입니다. 우리가 무슨 재주로 신의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신은 무소불위하고 무소부재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신의 사랑을 거부하거나 때로는 오도誤道할지라도, 신은 언제나 우리 옆에서 바라볼 뿐입니다. 우리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이 직접 무엇을 어떻게 행하는 게 아니라, 고통으로 또는 책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한 가르침으로, 즉 간접적인 방법으로 우리 스스로 깨닫게 되길 기다립니다. 여하튼 우리는 신의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신의 품안을 벗어날 수 없음입니다. 신의 품안에서 우리가 모두 걱정없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모든 건 우리 각자의 믿음에 달린 일이니까요.

'단상 또는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달음 속에서  (0) 2021.07.01
사랑과 애착  (0) 2021.05.15
무저항의 저항  (0) 2021.03.23
전쟁과 지휘관  (0) 2021.03.08
나는 신의 사랑을 믿는다  (0) 2021.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