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신타나 2021. 10. 17. 06:27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불교 반야심경에 나오는 이 구절에서 전도몽상을 한마디로 줄이면 착각이 되며, 원리전도몽상을 쉽게 얘기한다면 착각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착각에서 벗어나야 착각인 줄 알지, 착각 속에 있을 땐 그게 착각인 줄 꿈에도 모르기 때문에 원리전도몽상이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또한 우리는 구경열반에 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원리전도몽상 즉 착각에서 벗어나는 게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집을 지을 때 1층을 먼저 짓고 그 위에 2층을 올려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착각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을까? 착각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말과 같다.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스스로 옳다고 여겨지는 생각 또는 관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스스로 옳은 생각이나 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삶에서 고통이 따르기 전까지는 자기 생각이나 관념을 바꾸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삶에서 고통이 반복될 때 우리는 원인을 찾게 되며, 그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여기서도 우리는 대부분 현생 또는 전생에서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해보지만, 자기 생각이나 관념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한다. 고통의 시간이 더 계속될 때 그때서야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관념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때가 바로 자신의 착각이나 고정관념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출발선이자 기회이다. 스스로 옳다고 굳게 믿었던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진보이며 발전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들어 생각해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막강한 정치 권력을 함께 행사하던 중세 유럽에서는 천동설이 진리였다. 눈에 뻔히 보이는 사실인 데다 당시 모든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과학자, 철학자, 신학자 등등이 지동설을 주장하고 또한 이를 받아들였을 때, 당시의 종교 권력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고수하려고 하였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 권력을 사용하여 지동설을 주장하는 자들을 종교재판에 회부하고 심지어는 화형까지 시켜 죽였다. 오늘날에는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조차, 당시에 지동설을 믿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교황을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어리석었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오늘날의 자신들 역시 그런 어리석음에 빠져있는 줄은 전혀 모른다. 지금도 여전히 그들은 바이블이 진리라고 믿는다. 바이블이 진리인 게 아니라, 그들이 바이블을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일 뿐임을 자각하지 못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이블이 진리라고 믿는 의식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주관적인 믿음을 객관화시키고 있는 것임을 전혀 깨닫지 못함이다.

객관적인 진리란 있을 수 없음에도 우리는 누구나 쉽게 객관적인 진리에의 유혹에 빠지곤 한다. 자신의 주관적인 믿음을 객관화시키고자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의 고정관념이 옳다는 믿음을 더욱 강화시키고자 한다. 그래야만 불안하지 않으며 가만히 있으면 불안이 점점 더 커지고 자라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있을 때 평안하지 않고 무언가 계속해서 스스로 세뇌시켜야 마음이 평안하다면, 우리는 자신의 고정관념을 꺼내어 살펴보아야 한다. 조용할 때 마음이 평안하지 않다면, 이는 의식 깊은 곳에 있는 잠재의식에서 자신의 관념들끼리 서로 충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면에서의 관념적 충돌을 무시하고 외부에서 신앙적 믿음을 통하여 내면의 관념적 충돌을 억누르려고 하는 게 보통의 우리들 모습인데, 이게 바로 지동설을 주장했던 선각자들을 종교재판에 회부한 교황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과 똑같은 행동이다.

내면에 있는 자신의 믿음 즉 고정관념을 되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의 믿음과 같다는 착각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신의 믿음이 객관적 진리라는 착각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각자 자신의 믿음일 뿐이다. 자신의 믿음을 통하여 현실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성공했다 할지라도, 그건 또 하나의 진리일 뿐 유일한 진리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에 객관이란 없다.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장소에서 다수의 주관을 객관이라고 하는 것일 뿐이다. 고로 객관이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한정된 진리일 뿐이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기 전인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공중으로 던진 돌이 땅으로 도로 떨어지는 이유는 땅에서 난 것이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온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이 객관적 진리였다.

고로 객관이나 상식을 너무 좋아하지 말 일이다. 그게 바로 어리석음이나 착각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젊어서는 외부에서 지식을 흡수하는 게 중요하지만, 나이가 좀 들어서는 스스로 옳다고 믿어 마지 않는, 내면에 고정된 관념을 다시 꺼내어 이를 되새겨보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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