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윤회
모든 우월감은 열등감에서 나온다. 그래서 스스로 깨달은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갖고 있다면, 그는 여전히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음이다. 즉 열등감이 없는 상태에서는 우월감이 저절로 사라지며, 우월감이 없다면 그의 무의식에 있는 열등감도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우월감도 열등감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충만함과 기쁨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우월감이 있는 한 열등감이 남아있는 것이며, 열등감이 있는 한 우리는 자유로움과 충만함과 절대적 기쁨을 느낄 수 없다. 기껏해야 우월감에 의한 상대적 기쁨에 빠졌다가 다시 우울해지는 감정의 윤회를 경험할 뿐이다.
감정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기쁨 즉, 깨달음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우리는 육신의 윤회를 반복해서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어떤 사실을 지식적으로 깨닫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일컬음이다. 그리고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한 번 맛보았다고 해서 두려움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는다.
썰물처럼 밀려갔던 두려움이 어느 순간 밀물처럼 다시 밀려오게 된다. 이때 다시 밀려오는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의 깨달음은 비로소 안정되며 그 진폭도 점차 작아지게 된다. 다시 한번 더 반복하지만 깨달음이란 어떤 새로운 지식을 깨닫는 게 아니라,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을 일컫는다.
깨달음 이후에도 보림이 필요한 이유는, 히말라야 고봉 등정을 비유로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봉 등정에 성공했다 해도 하산할 때의 위험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과 같다. 등정 후 하산할 때는 즉 깨닫고 난 후에는 추구심이 사라지고 암중모색이 없어지지만, 한 번 사라졌던 두려움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깨닫고 나면 더는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모든 깨달음에 관해 설명해 놓은, 예전엔 그토록 어렵던 책들이 술술 읽힌다. 그러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조난의 위험이, 하산할 때에도 올라갈 때와 똑같이 존재한다. 깨달음이 안정될 때까지 조심하면서 확인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추구심이 사라지고 깨달음에 관한 책 내용이 쉽게 이해된다 해도, 거기가 끝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새로운 시작인 셈이다. 깨달음 이후부터 오히려 공부를 더 하게 된다. 예전엔 어렵던 책 내용이 어렵지 않게 이해되지만, 기존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바뀐 새로운 패러다임을 스스로 체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천동설을 신봉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지동설이 옳을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가 지동설을 몸으로 체득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지동설이 옳음을 깨닫는 순간부터 그는 지동설에 관한 책 내용이 술술 읽히며, 더는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우월감은 열등감에서 나온다. 그래서 스스로 깨달은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갖고 있다면, 그는 여전히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음이다. 즉 열등감이 없는 상태에서는 우월감이 저절로 사라지며, 우월감이 없다면 그의 무의식에 있는 열등감도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우월감도 열등감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충만함과 기쁨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우월감이 있는 한 열등감이 남아있는 것이며, 열등감이 있는 한 우리는 자유로움과 충만함과 절대적 기쁨을 느낄 수 없다. 기껏해야 우월감에 의한 상대적 기쁨에 빠졌다가 다시 우울해지는 감정의 윤회를 경험할 뿐이다.
감정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기쁨 즉, 깨달음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우리는 육신의 윤회를 반복해서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어떤 사실을 지식적으로 깨닫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일컬음이다. 그리고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한 번 맛보았다고 해서 두려움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는다.
썰물처럼 밀려갔던 두려움이 어느 순간 밀물처럼 다시 밀려오게 된다. 이때 다시 밀려오는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의 깨달음은 비로소 안정되며 그 진폭도 점차 작아지게 된다. 다시 한번 더 반복하지만 깨달음이란 어떤 새로운 지식을 깨닫는 게 아니라,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을 일컫는다.
깨달음 이후에도 보림이 필요한 이유는, 히말라야 고봉 등정을 비유로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봉 등정에 성공했다 해도 하산할 때의 위험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과 같다. 등정 후 하산할 때는 즉 깨닫고 난 후에는 추구심이 사라지고 암중모색이 없어지지만, 한 번 사라졌던 두려움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깨닫고 나면 더는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모든 깨달음에 관해 설명해 놓은, 예전엔 그토록 어렵던 책들이 술술 읽힌다. 그러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조난의 위험이, 하산할 때에도 올라갈 때와 똑같이 존재한다. 깨달음이 안정될 때까지 조심하면서 확인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추구심이 사라지고 깨달음에 관한 책 내용이 쉽게 이해된다 해도, 거기가 끝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새로운 시작인 셈이다. 깨달음 이후부터 오히려 공부를 더 하게 된다. 예전엔 어렵던 책 내용이 어렵지 않게 이해되지만, 기존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바뀐 새로운 패러다임을 스스로 체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천동설을 신봉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지동설이 옳을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가 지동설을 몸으로 체득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지동설이 옳음을 깨닫는 순간부터 그는 지동설에 관한 책 내용이 술술 읽히며, 더는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