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한 세상
길을 지나다 보면 e편한 치과, 속편한 내과 등의 간판이 눈에 많이 띈다. 그런데 그러한 병원 그리고 아파트 이름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가 정말로 이 편한 세상이라면 어찌하겠는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치부하고 말 것인가?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숨만 내쉬겠는가? 물론 이 편한 세상이라고 느낀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밀려오는 절망과 두려움을 희망으로 덮으려 하거나 또는 회피라는 기제를 통해서 현실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세상이 될 것이다.
희망과 절망 그리고 기쁨과 고통이 윤회하는 세상이 아닌, 절망 속에서 희망이 샘솟고 고통 속에서 기쁨으로 충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죽을 것 같은 절망감과 두려움을 반사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밀쳐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단지불회 시즉견성 但知不會 是卽見性」 고려 시대 보조 지눌 선사가 쓴 수심결에 나오는 내용이라 한다. 「다만 불회(진리를 몸소 터득하지 못함 또는 명료하게 알지 못함)함을 알면 이것이 곧 견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견성의 뜻이다. 견성을 성불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그야말로 삼천포로 빠지고 만다. 여기서의 견성은 비유하자면 겨우 깨달음 학교에 입학한 것이며, 어렵사리 나들목을 찾아내어 고속도로에 들어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거에 모든 것을 깨달은 상태 즉 돈오돈수에서의 견성성불이 아니라, 이제 학교에 갓 입학한 것이며 고속도로에 막 진입한 것이다. 공부를 하는 일과, 목적지로 가는 일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한마디로 견성이란 깨달음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다.
단지불회! 스스로 모른다는 사실을 다만 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우리는 흔히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관념적으로 자각하는 것이 단지불회의 뜻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대로 지나쳐 버린다.
그러나 단지불회의 진정한 뜻은 생각으로 끝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말이지 목숨 건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과 또한 스스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한다면, 어느 누구든 한없는 우울감과 절망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절망과 포기가 따르지 않는 단지불회는 한낱, 관념적 지식이거나 알음알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절망과 포기에 빠져 계속 허우적거리기만 한다면 우리의 깨달음은 거기서 끝이다. 절망과 포기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절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정말로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새로운 희망을 붙잡아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윤회 즉 고통과 즐거움의 반복일 뿐이다. 새로운 희망을 붙잡고 절망을 극복하는 것이,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는 고해의 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절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새로운 희망으로 절망을 덮지 말고 절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을 것 같은 절망감과 두려움을, 두려움에 젖어 반사적으로 밀쳐내지 말고 눈물로 껴안아 보는 것이다.
외부 세계에서 희망을 찾지 말고 내면의 절망을 그대로 받아들여 보자. 그럴 때 절망과 포기 안에서 오히려 한 줄기 희망이 샘솟게 될 것이다. 외부 세계의 희망이 아닌 내면에서 희망이 자랄 때, 깨닫고자 하는 추구심은 의식에서 사라지고 무의식으로 들어가게 된다.
무의식에서 새로운 인연이 생기고, 인연에 따라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어느 날 문득 얻어질 것이다. 그런 다음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점차 안정되고 몸으로 체득될 즈음,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말 그대로 이 편한 세상임을, 우리는 어느 날 문득 또 다시 느끼게 될 것이다.
길을 지나다 보면 e편한 치과, 속편한 내과 등의 간판이 눈에 많이 띈다. 그런데 그러한 병원 그리고 아파트 이름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가 정말로 이 편한 세상이라면 어찌하겠는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치부하고 말 것인가?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숨만 내쉬겠는가? 물론 이 편한 세상이라고 느낀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밀려오는 절망과 두려움을 희망으로 덮으려 하거나 또는 회피라는 기제를 통해서 현실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세상이 될 것이다.
희망과 절망 그리고 기쁨과 고통이 윤회하는 세상이 아닌, 절망 속에서 희망이 샘솟고 고통 속에서 기쁨으로 충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죽을 것 같은 절망감과 두려움을 반사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밀쳐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단지불회 시즉견성 但知不會 是卽見性」 고려 시대 보조 지눌 선사가 쓴 수심결에 나오는 내용이라 한다. 「다만 불회(진리를 몸소 터득하지 못함 또는 명료하게 알지 못함)함을 알면 이것이 곧 견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견성의 뜻이다. 견성을 성불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그야말로 삼천포로 빠지고 만다. 여기서의 견성은 비유하자면 겨우 깨달음 학교에 입학한 것이며, 어렵사리 나들목을 찾아내어 고속도로에 들어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거에 모든 것을 깨달은 상태 즉 돈오돈수에서의 견성성불이 아니라, 이제 학교에 갓 입학한 것이며 고속도로에 막 진입한 것이다. 공부를 하는 일과, 목적지로 가는 일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한마디로 견성이란 깨달음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다.
단지불회! 스스로 모른다는 사실을 다만 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우리는 흔히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관념적으로 자각하는 것이 단지불회의 뜻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대로 지나쳐 버린다.
그러나 단지불회의 진정한 뜻은 생각으로 끝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말이지 목숨 건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과 또한 스스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한다면, 어느 누구든 한없는 우울감과 절망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절망과 포기가 따르지 않는 단지불회는 한낱, 관념적 지식이거나 알음알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절망과 포기에 빠져 계속 허우적거리기만 한다면 우리의 깨달음은 거기서 끝이다. 절망과 포기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절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정말로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새로운 희망을 붙잡아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윤회 즉 고통과 즐거움의 반복일 뿐이다. 새로운 희망을 붙잡고 절망을 극복하는 것이,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는 고해의 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절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새로운 희망으로 절망을 덮지 말고 절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을 것 같은 절망감과 두려움을, 두려움에 젖어 반사적으로 밀쳐내지 말고 눈물로 껴안아 보는 것이다.
외부 세계에서 희망을 찾지 말고 내면의 절망을 그대로 받아들여 보자. 그럴 때 절망과 포기 안에서 오히려 한 줄기 희망이 샘솟게 될 것이다. 외부 세계의 희망이 아닌 내면에서 희망이 자랄 때, 깨닫고자 하는 추구심은 의식에서 사라지고 무의식으로 들어가게 된다.
무의식에서 새로운 인연이 생기고, 인연에 따라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어느 날 문득 얻어질 것이다. 그런 다음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점차 안정되고 몸으로 체득될 즈음,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말 그대로 이 편한 세상임을, 우리는 어느 날 문득 또 다시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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