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체로서의 나는 사라져도 전체로서의 나는 영원하다
나란 없으면서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몸을 가진 유형으로서의 나 즉 개체로서의 나는 때가 되면 사라진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오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나는, 100년 안팎의 시간 동안 존재하는 일시적인 허상 내지 환영일 뿐이다. 이를 가리켜 불교에서는 무아 無我라고 표현한다.
반면 오감과 같은 감각으로는 인식되지 않지만, 느낌으로 인식될 수 있는 나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느낌으로 인식되는 나란 유형이 아니라 무형이며, 또한 개체로서 서로 분리된 부분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존재하는 전체인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처럼.
한마디로 우리는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 속에서 두려움에 떠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우주를 품고 있는 무형의 전체 즉 신으로서의 인간이다. 살아서는 잘 알지 못해도 몸이 죽어서는 저절로 깨닫게 된다는 게 많은 임사체험자들의 증언이다.
어떠한 필요에 의해 무형의 존재인 신이, 육신이라는 유형으로 나툰 모습 즉 신의 현현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고로 신이란 저 멀리 있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즉 우리는 몸으로 분리된 유형의 부분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인 무형의 전체이다.
우리는 현재의 우리 자신과 같이 고정관념과 두려움에 갇힌 생각이 아니라, 모든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두려움이 없는 사랑에 찬 생각이다. 우리는 어쩌면 생각 에너지 즉 생각하는 힘이다. 생각 에너지가 육신의 형태를 가진 채 무언가를 체험하고자 하는 게 곧, 신인 우리가 인간 육신으로 태어난 목적이다.
어느 쪽을 받아들이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중세 유럽 사람들이 믿었던 것처럼 인간으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서 신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현대의 많은 영성서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곧 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든지는 전적으로 각자의 자유의지에 달린 일이다.
몸이 죽고 나서 우리는 지상에서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자 할 때 적어도, 두 발로 걸어다녀야 하거나 자동차를 타고 다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존재 형식이 유형이 아니라 무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후세계에서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유형의 물질로 된 신체를 가진 자신을 상상하곤 한다. 어처구니 없는 착각이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공상이다. 임사체험자 중 누구도 지상에서와 같은 육체를 가진 채 존재한다고 증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평화로운 곳에서 생각으로 또는 생각의 속도로 이동한다는 얘기를 한다. 즉 유형이 아니라 무형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고로 우리는 죽은 뒤의 육체적 고통을 상상하지 않아도 된다. 육체가 없는데 무슨 육체적 고통이란 말인가.
결론적으로 우리는 죽어서도 무형으로 살아가지만, 살아서도 무형의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음이다. 물질적인 육체로 존재하는 우리 자신은 일시적인 도구 내지 수단이며, 본질로서의 우리 자신은 무형의 영적 존재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를 가리켜 무아 無我 또는 공 空이라고 한다.
다만 개체로서의 나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도, 전체로서의 나는 영원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불교에서 제대로 밝히지 못하므로, 때로는 단멸론을 주장하는 불교인도 더러 있다. 즉 무아 또는 공에서 멈추었기에, 불교 사상이 허무론이라는 지적에 대하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그러나 종교를 떠나서 우리는 분명히 존재한다. 내 몸이 나 자신인 건 아니지만, 무형의 내가 존재하기에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낄 수 있음이다. 일부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뇌에서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라, 무형의 우리 자신이 두뇌를 비롯한 몸을 통해서 또는 몸을 통하지 않고, 생각을 하거나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이게 바로 깨달음의 시작이다. 유형의 몸이 아니라 무형의 내가 존재한다는 자각이 곧 깨달음의 시작이다. 우주에 비해 티끌보다 작은 몸뚱이뿐만 아니라, 유형·무형의 우주 전체를 감싸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신이 존재함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곧 견성이다.
그리고 견성이란 깨달음의 시작일 뿐이다. 불교의 선사 중에는 돈오돈수 頓悟頓修를 주장하는 분도 있긴 하지만, 깨달음에 끝이란 있을 수 없다. 깨달음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것이지, 끝이 있다면 그러한 깨달음은 이미 죽은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처음에 이른바 확철대오를 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확철대오 뒤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분명한 깨달음이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더 깨달을 게 없다고 하는 주장은 한때의 착각일 뿐이다.
이 세상은 마치 용수철처럼 윤회하면서 진화하기 때문이다. 제 자리를 맴도는 게 아니라 조금씩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거나 또는 위로 올라간다. 진화에는 인간 영혼뿐만 아니라 신 神도 해당된다. 신조차도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진화하는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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