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主 而生其心
이성 理性이란 일상생활에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내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의문에는 오히려 방해꾼일 뿐이다. 무언가 영감이 느껴지기를 기다리고자 하면, 이성이 나서서 해석하고 판단하며 자신이 제시한 해답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성의 판단에 수긍하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성의 판단이 틀린 적보다는 맞는 적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성에 관한 한 이성에 의한 판단이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밑돌 빼서 윗돌 괴는 격이니 결국엔 지었던 집 전체가 무너질 뿐이다.
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내 안에 있는 지식으로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밖에서 새 물 즉 영감이 흘러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새 물을 찾아 밖으로 밖으로 나돈다. 외국에 있는 선각자나 선원을 찾기도 하고 또는 다른 종교를 통해서 해답을 얻고자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밖이란, 외부 세계에서의 바깥이 아니라 내면세계에서의 바깥을 말한다. 그렇다면 내면세계의 바깥이란 무엇을 말함일까? 이게 바로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主 而生其心)이 뜻하는 바이다.
응무소주 즉 응당 머무는 바 없다는 얘기는, 외부 세계의 감각적 지각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감각적 지각을 통해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이성의 해석이나 판단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이생기심 즉 그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성의 해석이나 판단에 머물지 않는 상태에서 영감이 떠오른다는 뜻이다. 영감이 떠오르는 것. 이게 바로 내면의 바깥이다. 내면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고로 바깥이라는 게 있을 수 없으나, 다른 적절한 표현이 없으므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어쩌면 영감이란 내면에서 그대로 떠오르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내면이 물질 우주와 형이상의 우주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기에, 내면에 있는 이성적 사유와 구분하기 위하여 내면의 밖이라고 표현하는 것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일상생활을 영위하게 되나, 우리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성적 사유에 머무는 바 없이 알고자 하는 그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이성적 관념에 머무는 바 없이, '나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 즉 화두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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