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무명 無明과 무아 無我

신타나 2021. 11. 6. 09:30

무명 無明과 무아 無我


무지 또는 무명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감각적인 앎 즉 지각 知覺이 곧 그것이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보이며, 눈에 보이는 자신의 몸뚱아리가 자신인 것처럼 보이는 게 바로 무지요 무명이다.

중세 유럽 로마 교황청의 교황을 비롯한 신부들이,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종교재판에 회부시키고 심지어 화형까지 시켰던 것도 그들의 무지와 무명 때문이었으며, 공중으로 던진 돌이 지상으로 다시 떨어지는 이유가 땅에서 난 것이기 때문이라는, 고대 그리스 현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이 바로 무지와 무명의 소산이다.

이러한 역사적 선례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의 우리조차도, 신체의 감각을 통한 인식 덕분에 우리가 보고 듣고 진리를 알 수 있다며 매우 기뻐하고 고마워한다. 옛날 사람 얘기할 것 없이 우리가 지금 무지와 무명에 빠져 있는 것이다.

물론 영성이라거나 또는 이른바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육체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마치 지동설을 배운 사람이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단지 지식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의 눈에는 날마다 태양이 돌고 있으며, 지구는 엄청난 속도로 돌기는커녕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또한 몸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처럼 느껴지며, 시끄러운 소리가 자신의 고막 안이 아니라 밖에 있는 물체에서 나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 모두가 감각의 오류일 뿐임에도 우리는 감각만이 진실을 담보한다고 믿는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감각이 오류 덩어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감각 즉 오감 속에 묻혀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오류 덩어리인 오감 속에서 오감만이 진실이라고 외치고 있는 게 바로 우리 자신인 줄 전혀 모르는 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지금 무명과 무지 속에 살고 있음이다.

일찍이 2,500년 전 석가모니가 이러한 가르침을 폈어도 무지와 무명은 오늘날까지 여전하다. 해서 지금부터는 우리 몸뚱이를 비롯한 지구상의 물상이 왜 오감에 의한 감각적 오류인지를 하나의 비유를 들어 얘기하고자 한다.

날씨가 추운 날 장갑을 끼고 글씨를 쓰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이때 장갑이 글씨를 쓰는 것인가? 물론 우리의 인지 능력은 장갑이 아니라, 장갑 속에 있는 손이 펜을 쥐고 글씨를 쓰고 있음을 아는 정도는 된다.

그런데 글씨를 쓰는 게 장갑 속 손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 손이라는 도구를 통해 쓰는 것임을 알지는 못한다. 겨우 안다는 게 뇌에서 명령한다는 과학적 지식이거나 또는, 마음이 모든 걸 움직이게 한다는 종교 내지 심리학적 지식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두뇌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무형의 내가 있음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정작 글씨를 쓰는 존재는 무형의 에너지다. 기 氣라고 하든 에너지라고 하든 또는 능력이라고 하든 상관없이, 글씨 모양이 예쁘게 쓰였는지 그리고 쓰인 글씨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글의 내용이 문맥에 맞는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존재가 손이 아닌 건 분명하다.

다른 무언가가 손을 통해서 이렇게 대단한 능력을 보이는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비교적 쉽게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런데 다른 무언가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갈린다. 몸의 한 부분인 두뇌냐, 마음이냐, 영혼이라고도 불리는 '무형의 나'이냐 등등.

이쯤에서 이 글의 첫머리로 돌아가 보자. 「무지 無知 또는 무명 無明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감각적인 앎 즉 지각이 곧 그것이다.」라는 명제를 떠올려보자. 두뇌가 감각을 인지하며, 마음이 인지된 감각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 아니던가?

그렇다면 두뇌도 마음도 결국 감각의 종속 변수일 뿐이다. 감각에 의해 속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의 근대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이성 理性을 중요시했다. 무소불위의 중세 기독교 신앙이 차치했던 자리를 이성이 빼앗아버렸다.

현대의 과학자들도 여전히 이성을 전가 傳家의 보도 寶刀로 알고 있으나, 이성 역시 감각의 종속 변수일 뿐이다. 물론 지동설과 만유인력 법칙 등을 밝혀냈지만 그들 과학자라고 해서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몸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오감의 도움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지만 동시에 오감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오감으로부터 깨어나는 유일한 길은 우리 자신이 무형의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유형의 몸이거나 몸과 함께하는 마음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달아야 한다.

텅 빈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주가 탄생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텅 빈 침묵이면서 동시에 물질 우주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 모든 것이다. 우리가 곧 신이며 무소불위하고 무소부재한 존재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무아 無我와 공 空을 설파하였다. 물상으로서의 내가 없으며 텅 빈 침묵임을 이천오백 년 전에 이미 밝혔다. 그런데 석가모니 말씀이라는 불교 경전에도 허와 실이 있다. 금강경에 나와 있는 대로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이라면, 우리 몸 자체를 비롯한 먹는 음식과 입는 옷, 사는 집이 다 환영이요 허상이라는 말인가?

나는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몸뚱이와 음식과 옷과 집 등이 환영이거나 허상인 게 아니라, 뇌 속에 있는 우리의 감각에 의해 만들어진 관념이 바로 환영이며 허상이라는 것이다. 허상과 환영은 물질 우주에 존재하는 물상이 아니라, 물상에 대한 감각적 이미지와 지식으로 이루어진 우리 내면의 관념이라는 말이다.

물론 지구상의 물상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때가 되면 시들고 죽고 사라지고 없어진다. 그러나 그것들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는 그것이 환영이거나 허상인 게 아니라 실재하는 대상이다. 정작 환영 또는 허상인 것은 외부에 있는 물상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있는 관념이라는 사실을 나는 지금 주장하고 있음이다.

오류 덩어리인 오감에 의해 형성된 관념이기에 환영이거나 허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외부 세계에 실재하는 물상이 비록 일시적으로 존재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그게 환영이거나 허상인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보면 환영이나 허상처럼 보일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자신은 몸이나 마음이 아니라 감각되지 않는 '무형의 침묵' 또는 '무형의 빛'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또한 지구상에 존재하는 우리 몸을 비롯한 물상들이 환영이거나 허상인 게 아니라, 물상에 대한 오감의 작용을 통해서 얻어진 인식 즉 내면의 관념이 바로 환영이요 허상이라는 사실을 나는 여기서 주장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