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깨달음 공부

신타나몽해 2021. 12. 1. 11:56

깨달음 공부

1
우리가 의식 속에서 자신을 생각할 때는, 자신을 떠올림과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이게 바로 상대계를 사는 보통의 우리 모습이다. 자기 혼자 내면의 우주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의식 속에서만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을 고해 苦海로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또한 이게 바로 '나'라는 자신은 없고 '남'이라는 타인만 존재하게 만든다.

이를 다르게 표현한다면,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타인과 비교하는 삶을 살 뿐이다. 타인과 비교하는 삶에는 나 자신은 없고 타인만이 있음이다. 그래서 만나는 대상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파도처럼 요동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다음에는, 생각이 예전처럼 쉼 없이 일어나지도 않으며 또한 일어난다 해도, 생각과 감정 속에 파묻히지 않게 된다. 자신의 생각 또는 감정에서 벗어나, 오히려 그것들을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자신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한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 이게 바로 자신을 알게 되는 길이자 문 門이며 이름하여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깨달음에 대한 얘기를 좀 더 부연한다면 다음과 같다.

깨달음이란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이성 理性에 의한 생각을 비우고 또한 감정, 감각, 욕구 (욕망), 기억 등 마음에 담긴 모든 것을 비우는 것이다. 비워졌을 때 스스로 텅 빈 빛임이 느껴진다. 자신이 텅 빈 존재로 느껴지므로, 물질 우주를 포함하여 모든 관념의 세계가 자연스레 자신 안에 담기게 된다.

즉 자신이 우주에서 먼지보다 작은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우주를 담고 있는 우주보다 큰 존재임을 느낄 수 있다. 다만 비운다는 게 무엇을 내려놓거나 끊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의 생각 또는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벗어나는 방법은 다름 아닌,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생각에서 기억까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에 대한 불안감마저 받아들일 때, 이때 모든 감정이 사라지며 어느 순간 문득 내면에서 깨달음이 시작된다.

자신이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존재임을 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이 스스로 느껴진다. 이때가 바로 지금까지 자신으로 여겨왔던, 생각을 비롯한 감각에서부터 기억까지의 모든 관념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이게 바로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깨달음이다.

즉 깨달음이란 밖에 있는 무엇을 얻거나 가져오는 게 아니라, 자신 내면에서의 변화일 뿐이다.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을 때 즉, 스스로 의존하는 어떤 것도 없을 때 우리는 무 無가 된다. 무 또는 물이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떠한 것에도 걸림이 없게 된다. 자유자재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다. 여기서부터 끝이 없는 깨달음이 간간이 이어지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른바 대오 大悟를 했든 아니면 작은 깨달음을 느꼈든, 자신도 모르게 기쁨에 찬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면의 울림이 계속된다. 스스로 내면에서의 변화가 이어지고 깨달음의 기쁨이 느껴지는 것이다.

2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학교에서의 학문적 공부 또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배우게 되는 예절이나 사회적 가치 등에 대한 지식적 공부는, 옳고 그름과 잘잘못을 구분하여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하는 방식이다. 즉 지식적 공부는 무언가를 더하는 방식이다. 더해야 하므로 밤잠 자지 말고 촌음을 아껴가며 공부하라고 가르친다.

반면 흔히 마음공부라고도 하는 깨달음 공부는, 더하기가 아니라 오히려 빼기이다. 그런데 마음공부라는 말이 심리학이나 심령술 등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어, 여기서는 깨달음 공부라는 용어를 쓰고자 한다. 깨달음 공부는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함인데, 이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나 가치 기준 정립과는 달리, 모든 걸 무조건 수용하는 방식이다.

자신 안에 있는 우월감과 열등감은 물론이고 사랑의 감정과 두려움 모두를, 어떠한 분별도 없이 무조건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빼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 얼핏 보면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외부의 자극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일 때 자신 안에 있는 이런저런 감정과 관념이 빠져나가게 된다. 받아들일지 말지를 분별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의 내면이 오히려 텅 비는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진리라는 게 우리가 획득하거나 발견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진리이며, 이러한 상태가 되었을 때 그동안 우리가 의지했던 대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결국 진리와 자유 모두 밖에서 얻는 게 아니라 자신이 곧 진리의 상태가 되는 것이며, 진리의 상태일 때 자신이 의존했던 대상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롭게 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상태'란 더하기 방식이 아니라 빼기 방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받아들일 때 우리 자신이 무 無가 되거나 물이 되는 것이다.

3
참나 또는 신이 하나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무 無이지만 영원히 존재하는 게 바로 신이고 참나이다. 또한, 이 세상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침묵임을 깨닫는 동시에, 자신 역시 아무것도 없는 무임을 깨닫는 게 바로 깨달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무언가에 의지하고자 한다. 신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어렸을 때는 부모 등 보호자에게 의지하게 되며, 성장해서는 신념이나 사상, 신앙, 종교 또는 절대자에 의지하고자 한다.

적어도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자신의 몸을 내맡기며 살아간다. 엄밀히 말한다면 시간과 공간이라기보다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기억 속에 자신을 내맡긴다. 우리는 과거에 대한 기억 속에,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라는 상상 속에 파묻혀 산다.

그래서 하루에도 오만가지 생각이 일어난다고 하는 말이 있다. 기대와 불안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게 보통의 우리 삶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라는 X축과 공간이라는 Y축에 의해 만들어진 기억의 교차점을 연결하는 그래프를 벗어날 수도 있음이다.

기억이라는 그래프를 따라가며 기대 속 흥분과 불안 속 고통을 반복적으로 겪는 대신, 그러한 통념적인 삶에서 벗어나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도 있음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서두에서 나는 「이 세상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침묵임을 깨닫는 동시에, 자신 역시 아무것도 없는 무임을 깨닫는 게 바로 깨달음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게 바로 자유로운 삶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신이 아무것도 없는 무임을 확철하게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때부터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무인데 무엇에 의지하고자 하겠는가?

자신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빛 또는 텅 빈 침묵임을 깨달은 상황에서만이, 두려움 하나 없는 마음 상태가 될 수 있다. 그게 바로 진정한 자유이다. 유형 또는 무형의 무엇이 남아있으면 우리는 결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곧 무임을 자각하고 체득해야 한다.

머리로 이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몸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몸으로 체득하는 것! 이게 바로 깨달음 후의 보림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며, 히말라야 고산 등정 성공 이후 하산 과정의 어려움에 비유할 수 있겠다.

고산 등정이 물론 쉽지 않지만 등반 성공 이후 하산길에서도, 등반 때와 똑같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베이스캠프와 도착했을 때 비로소 등반 성공이 되는 것이다. 깨달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견성 이후 보림 과정을 지나서 깨달음이 안착되었을 때라야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후로 자신이 곧 신임이 점점 확실히 느껴진다. 신이라는 얘기는 전체라는 뜻이자, 무소불위하고 무소부재한 존재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 신 아닌 게 없듯이, 이 세상에 나 아닌 게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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