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정체성의 꼰대

신타나 2022. 7. 24. 23:27

정체성의 꼰대


4번의 허물을 벗으면서 약 25일간 몸집이 10,000 배 정도 자란다는 누에처럼, 사람도 유치원에서부터 입학과 졸업을 반복하며 육체적, 정신적 성장을 거듭한다. 다만 누에 등 다른 동물과 달리 사람은 한때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넉잠 자고 난 누에가 스스로 자신을 가두기 위해 누에고치를 짓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정체성 확립의 시기인 청소년기가 있다. 누에가 고치 안에서 번데기로 성장하듯, 사람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다음 확립된 정체성 안에서 정신적 안정과 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번데기가 되었을 때 누에는, 고치 안에서 계속 번데기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나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방이 되어 고치를 뚫고 밖으로 나오게 된다. 반면 사람의 경우에는 누에와 달리, 정신적인 누에고치 즉 자신의 정체성 안에 계속 머무는 게 가능하다.

나방이 되어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야 함에도, 정신적으로 안주해오던 정체성에서 벗어날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번데기가 되어 자신의 정체성 안에 계속 머물고자 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말라붙은 번데기 즉 정체성의 꼰대에 만족하곤 한다.

청소년기에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중장년기를 지나면서 정체성에서 벗어나기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청소년기부터 쌓아온 정체성 즉 자신만의 정신적 성곽을 다시 허문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의 경우에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래서 나방이 되지 못하고 번데기로 생을 마치는 정체성 꼰대의 비율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임을 깨닫는 경지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필요는 있다. 힘들었던 청소년기에서부터 자신을 감싸주고 보호해준 정신적 틀 - 정체성을 스스로 깨어 부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고치를 뚫고 나오는 나방처럼 또는 안에서 알을 쪼는 병아리처럼,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정체성이란 정신적 고정관념일 뿐이다. 청소년기에 지어진 정체성이라는 집에서, 중장년기를 지나 노년이 되기까지 그대로 버틴다면, 여기저기 비 새는 집에 깡통이나 대야를 받쳐두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 비가 샌다면 새는 구멍을 자꾸만 틀어막을 게 아니라, 아예 지붕개량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방이 되어 몸집이 커짐에 따라 찢어지려는 고치를 자꾸만 기우려고 하거나, 안에서 병아리가 되어 금이 가고 있는 달걀껍질을 땜빵하려 들게 아니라, 아예 기존의 보호막 안에서 과감히 밖으로 뛰쳐나와야 한다. 나방이 되어야 함에도 이를 거부하고 번데기로 남으려는 어리석음을 버리자. 용기 있게 나방이 되어 고치 밖으로 나가자.

스스로 돌이켜 볼 일이다. 청소년기에서부터의 정신적 울타리인 정체성을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지, 아니면 기존의 틀 속에서 벗어났는지를 말이다.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다. 스스로 돌이켜 보아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아니면 기존의 정체성을 부여잡고 그대로 머물 수도 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채 살아가는 존재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면도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프로그램된 컴퓨터 게임에서처럼, 이미 현실이 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자유의지에 따라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한다.

이쪽으로 갈 것인가 저쪽으로 갈 것인가? 문을 열고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청소년기부터 어렵게 쌓아온 정체성을 스스로 부수어 버릴 것인가, 군데군데 땜질하며 살아오던 대로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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