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무서움이 바로 신이다

신타나 2023. 10. 20. 02:42

무서움이 바로 신이다


화장실에서 깜깜한 창고 쪽으로 난 쪽창에 설치된 방충망. 방충망에 생겨난 구멍을 메꾸기 위해 붙여둔 노란 색 박스 테이프.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아니면 세면대 앞에서 양치질할 때마다 눈에 띈다. 옆눈으로 보이는 노란 색이 신경 쓰인다. 무서운 마음일 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떠오른 한 생각!

내 마음에 들어선 무서움조차 그게 바로 신 神이라는 생각이다. 무서움이 곧 신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 마음에 들어있던 무서움이 사라졌다. 신은 내가 어렸을 적이나 지난날의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이제는 친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이 바로 내 근원이자 나 자신이고 내 엄마와 아빠라면 무서울 게 무엇인가?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창고에 드리운 캄캄한 어둠조차, 이 모든 게 사랑 자체인 신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무서울 게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 아름다운 것도 무서운 것도, 모두가 신이자 신의 사랑이다. 우리를 깨우치기 위해 신은 무서움을 창조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지상의 모든 게 평화롭고 평온하다면 천상과 다를 게 무엇이며, 우리가 지상에 내려올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굳이 애써 지상에 내려올 필요가 없음이 분명하다. 천상과 지상이 똑같다면 말이다.

고로 우리 인간이 지상에 내려온 이유가 분명 있으며, 그게 바로 무서움의 고통을 통해서 신의 사랑을 깨닫기 위함이리라. 천상에는 신의 사랑만이 있기에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음이다. 세상이 온통 파란 색이라면 우리는 파란 색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외로움조차 신의 사랑이다. 외롭지 않다면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 시에 나오는,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구처럼 우리는 외롭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다만 외로움의 고통을 느껴보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신의 사랑을 제대로 느껴보기 위해서이다.

고통을 느끼고자 함이 아니라 사랑을 느끼고자 함이다. 즉 모르는 상태에서의 사랑이 아니라, 고통을 체험함으로써 신의 사랑을 제대로 알고 느껴보고자 함이다. 추위를 겪어보지 않는다면 따뜻함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로 우리는 어떠한 고통일지라도 고통을 거부하고자 발버둥 칠 게 아니라,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 인간의 삶이란, 신의 사랑이라는 더 큰 기쁨을 느끼기 위한 과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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