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불살생 不殺生

신타나몽해 2023. 9. 20. 18:45

불살생 不殺生


살생이 살생이 아니다. 다시 말해 불살생이란 살생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살생이 살생이 아니라는 뜻이다. 무릇 생명이란 동물에만 있는 게 아니라 식물에도 있지 아니한가? 그런데 이를 동물로만 한정하여 살생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만들어놓는 게 보통의 종교 계율이다. 어떤 종교에서는 다른 요일에는 상관없지만, 특정한 요일에 특정한 동물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계명도 있었다.

지금이라면 같은 종교를 믿는 후배 종교인들도 선배 종교인들의 이와 같은 금기에 대하여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현재도 명상할 때나 일상생활에서, 달려드는 모기를 일부러 잡지 않고 참으며 수행하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종교적 수행 방법도 있다. 그러나 모기를 애써 잡지 않으며 수행하는 그들 종교의 교주가, 돼지고기를 먹은 후 식중독에 걸려 설사병이 나고 결국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을 터이다.

그들 교주도 돼지고기를 먹은 다음 병을 얻어 결국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런 교주가 첫 번째 계율로 살생하지 말라고 가르쳤을 거라고 그들은 진짜로 믿는 것일까? 논리적으로도 역사적 기록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다. 교주가 식중독으로 죽게 되자, 사후에 제자들이 모여서 살생하지 말자며 이를 계율로 만들었다면 혹시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이처럼 엄숙하기 그지없는 종교에서조차 코미디 같은 계율과 계명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있다. 다른 동물의 고기는 괜찮지만 특정한 동물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며, 생명은 다 같은 생명일진대 식물의 생명을 해하는 건 괜찮고 동물의 생명을 해하는 건 안 된다는 가르침은 누가 정한 것일까? 어리석은 가르침일 뿐이다.

불교 반야심경을 보아도 불생불멸, 부증불감인데 무슨 살생을 금한다는 말인가? 서로 이율배반적인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한쪽에서는 살생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불생불멸을 설하고 있으니 말이다. 불생불멸이 맞는다면 살생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살생이라는 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우리 목숨이 불생불멸이라는 말이 거짓 아니겠는가?

이 중에서 나는 불생불멸을 받아들인다. 동물은 뒤로 미루어 놓고 우선 식물의 씨앗을 살펴보면, 씨앗이 땅에 묻혀 썩어 없어질지라도 씨앗 안에 든 생명은 새싹이 되어 다시 자라지를 않던가? 이게 바로 생명체에 깃든 모든 생명이 불생불멸이라는 사실의 더 할 수 없는 증거인 것이다. 씨앗을 비롯한 생명체로서의 물질이 죽어 없어지더라도, 그 안에 든 생명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과 인간까지도 그들의 생명체 안에 든 생명은 영원하다.

생명이 깃든 생명체, 그것이 식물이든 동물이든 또는 사람이든 생명체가 곧 생명인 건 아니다. 생명이란 생명체에 깃들어 존재할 수도 있으며, 생명체를 벗어나 존재할 수도 있음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생명체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라고 말씀한 것이다. 눈이 한 번 앞을 잘못 봤다고 해서 눈을 빼버리라는 얘기가 아니라, 생명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생명체인 몸으로 오인하지 말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오랫동안 그리고 뼛속 깊이 자신의 몸을 자기 자신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예를 든 씨앗 하나만 봐도 생명체인 몸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뚜렷이 알 수 있지 아니한가? 그러니 육식 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것이나, 잡식 동물인 인간이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것이나 그리 특별한 일인 것은 아니다. 생명체의 먹이는 대부분 다른 생명체이지 않던가? 그런데도 깨달은 석가모니가 자신은 살생을 통해 얻은 고기를 먹으면서도 제자들에게는 살생을 하지 말라고 가르쳤을까?

불교의 첫 번째 계율이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이라는 주장은 그들 교주를 오히려 욕되게 하는 것일 뿐이다.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불살생 不殺生이 "살생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살생이란 없다"라는 뜻이라고 본다. 생명이란 죽거나 없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영원 그 자체임을 깨달으라는 석가모니의 간절한 바램이 첫 번째 계율에 담겨있는 게 아닐까 싶다. 생명을 없애는 게 살생인데, 생명이 영원하다면 살생이라는 개념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살생을 하지 말라 - 해도 괜찮다가 아닌, 우리 생명은 영원하며 불생불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얘기가 그저 종교 경전에 나오는 어려운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인 생명에 관한 내용임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동물과 식물 등 생명체에 깃든 모든 생명은, 영생 그 자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정 조건을 충족해야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조건도 없이 모든 생명체에 깃들어 있는 생명은, 다른 이유 없이 단지 생명이기 때문에 영생을 하는 것이다. 조건이 없는 사랑! 이게 바로 신의 사랑인 아카페 사랑 아니던가? 인간들처럼 이런저런 조건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아무런 조건이 없는 게 바로 신의 사랑이다. 신의 조건 없는 사랑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인 생명으로서 불생불멸의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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