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절을 생각하며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20대 내내 나에게 간간이 들었던 의문이다. 다른 사람에 비하여 돋보이지도 않았고, 이렇다 하게 내세울 것도 없는 현실에 나는 우울해했다. 그러던 20대 끝 무렵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30대가 끝나갈 무렵 내 사고방식은 나도 모르게 염세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있었다. 결혼 직후 아이를 갖지 않는 게 어떻겠냐고 물은 적이 있는 내가, 그럴려면 뭐 하러 결혼했느냐는 아내의 대답 겸 질문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해서 손주를 바라는 부모에게 한가지 효도라도 한다는 생각으로 아이를 가질 정도로 염세적이었는데 말이다.
지금은 60대 중반이 넘은 나이다. 명예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자살을 꿈꾸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경제적 어려움이나 육체적, 정신적 고통 등이 원인일 수는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는 게 두려워 이를 회피하고자 자살을 행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아무튼 20대와는 달리 지금의 나는, 명예의 손상조차도 하나의 경험이라는 생각이다. 자신의 명예가 삶의 전부가 아니라, 명예를 드높이든 아니면 명예의 상실이든 모든 게 삶에서 체험의 도구라는 점이다.
명예가 올라가는 것에 대한 체험도 필요하고, 추락하는 것에 대한 체험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명예가 우리 몸의 생명에 견줄 만큼 대단한 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체험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은, 우리 인간에게 명예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그러나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우리 몸의 생명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우리는 몸으로의 삶을 통해서, 명예와 불명예를 경험하기 위하여 지상에서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남겨도 괜찮다는 뜻이다. 우리가 지상의 삶을 끝낸 뒤 천상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면, 그 모든 게 하나의 체험에 지나지 않으며 스스로 악역을 맡은 배우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 악역을 맡은 배우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이 일어난 당장에는 아닐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명예스러운 일뿐만이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일에도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모든 배역을 체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자랑스러운 일뿐만 아니라,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일지라도 그렇다. 또는 기쁘고 즐거운 일만이 아니라, 괴롭고 슬픈 일일지라도 그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한다. 당장은 그렇게 되지 않을지라도 언젠가는 말이다. 명예스럽고 기쁜 일과 함께 불명예스러운 일과 괴롭고 슬픈 일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지상에서의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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