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길
깨달음의 길에서 우리는 맨 처음, 이 길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맞을까 아니면 저 길이 맞을까 하고 헤매게 된다. 그다음은 점차 어느 하나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하나의 길로 수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반전이 생긴다. 왜냐하면 마지막인 것 같은 그 길에서도 우리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갈 길이 갈려진다. 드디어 깨닫는 길과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길로.
이게 바로 절벽에 있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두 손 중, 마지막 잡고 있는 한 손마저 놓아버리라는 비유이다. 포기조차 포기해야 진정한 포기이며, 절망조차 내려놓아야 진정한 내려놓음인 것과 같다. "이 길이다."라고 생각했던 그 길마저 내려놓는 게,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다. 그래서 나는 포기조차 포기하라고 했으며, 절망조차 붙잡지 말고 내려놓으라고 했던 것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그 길조차 버리는 게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이게 바로 불교에서 집착을 버리라고 할 때의 그 내려놓음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온 힘을 다해 붙잡았던 그 길조차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반전이 있다.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고 처음부터 내려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깨달음은 직접 체험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깨달은 스승 등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추구심을 내려놓을 수는 없다. 자기가 직접 시행착오를 겪어봐야 비로소 추구심이 내려놓아지는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이나 선각자의 경험을 받아들여, 그 말씀을 따라 행해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즉 간접 체험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다. 스승이나 선각자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자신이 직접 겪어봐야 추구심이 사라지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깨달은 많은 선각자가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내가 시행착오를 겪어봤으니, 너희들은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말고, 지름길로 곧장 가라는 충고인데, 이게 바로 어리석은 가르침인 것이다. 우리는 간접 경험으로 얻을 수 있는 앎이 있고, 비록 시간이 걸리고 돌아가더라도 직접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앎이 있다. 깨달은 많은 선각자가 지금까지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다른 가벼운 깨달음은 간접 경험을 통해서도 깨닫게 되나, 가장 큰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은, 결코 간접 경험을 통한 지름길이 있을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자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선각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는 적절한 방편을 찾지 못했다는 말이다.
깨달음의 대명사인 석가모니조차도 일평생을 자신의 깨달음을 전할 방편을 찾고자 애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도 그 나름으로는 최선의 방편을 통해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고자 했지만, 오늘날까지 깨달은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방편이 그리 출중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석가 사후에 많은 조사와 선사의 가르침이 또한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깨달은 사람에게는 깨달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전할까?"가 화두인 것이다. 어쩌면 방편을 찾기 위해 보림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깨달음을 얻는 게 중요하고, 깨달음을 이미 얻은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자신의 깨달음을 타인에게 전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래저래 깨달음이란 얻기도 쉽지 않고 전하기도 쉽지 않다. / 김신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