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 또는 깨달음
우리는 평소 머리 속으로 자신을 떠올립니다. 떠올리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이든 아니면 개인적인 신체 모습이든, 우리 머리 속에 떠오른 모든 것은 대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대상인 자신은 진짜가 아니라 모두가 허상인 가짜입니다. 칼이 자신을 벨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머리 속에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무아 無我인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설한 무아란 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평소 머리 속에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상이 가짜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머리 속에 가지고 있는 상을 스스로 없애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나는 가짜이고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간직해온 자신에 대한 상이, 버려야 할 가짜요 허상이라는 말입니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나란 대상일 뿐 주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영원한 주체이지 대상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머리 속에 떠오르는 대상으로서의 나는 가짜요 허상이며, 가짜요 허상이기 때문에 그러한 나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석가모니는 무아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 즉 나라는 것을 머리 속으로 상정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칼이 칼 자신을 벨 수 없으며, 거울이 거울 자신을 비출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나라는 주체는 어떠한 경우에도 객체화 되거나 대상화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인지를 깨닫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요?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자신에 대한 인식이 생기는 어릴 때부터 머리 속에서 형성된, 자신에 대한 상(이미지)을 한순간에 없애버린다고요? 이 역시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어려움을 불교에서는, '백척간두진일보' 또는 '은산철벽'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깨달은 분 중 일부는 우리에게 생각을 버리라고 하는데 이는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불가능한 방법인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머리 속 생각으로 자리 잡은 자신을 죽여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무아라는 게 내가 없다는 뜻도 되지만, 허상의 나를 없애라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한마디로 무아란 허상의 나를 없애야 한다는 뜻입니다. 허상의 나를 노력해서 애써 없애야 가짜인 내가 없어지지, 가만히 앉아 있는데 허상인 내가 없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붙들고 있는 나! 그게 바로 가짜이고 허상이며 스스로 죽여 없애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마음속의 나와 함께 살아갑니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속에 그러한 허상의 가짜 나가 있음은 자각하기도 어렵습니다. 또한 마음속의 나를 자각한다고 해도, 그게 허상인 가짜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기가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닫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는 지동설이 받아들여지기까지 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었음을 되새겨본다면 쉽게 수긍이 갈 것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라는 것은 태양이나 지구처럼 보이는 대상이 아니기에, 이를 깨닫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우리는 시각과 청각 등 감각적인 것에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기에, 자신이 평생 함께하고 있는 몸이 바로 자신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더욱이 그러한 몸과 함께 자신의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자신에 대한 상에서 벗어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죠.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삶에 대한 허무감이라든지 죽음에 대한 불안감 또는 무언가 자유롭지 못한 불편함이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이가 좀 들고 나면 허무감, 불안감, 구속감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고자 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인 무아 無我가 무슨 뜻인지를 알고자 애쓰기도 하며, 또는 자신에서 벗어나고자 애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르침은 종교 경전뿐만 아니라 책이나 유튜브 등에도 무수히 많이 나와 있습니다. 애쓰다 보면 가고자 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암중모색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도 조바심 내지 말고 계속 가다 보면, 조금씩 깨달음이 자신의 내면에 쌓이게 됩니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견성이며 이때가 바로 깨달음의 시작입니다. 견성이란 깨달음의 종착지가 결코 아닙니다. 돈오돈수란 착각일 뿐입니다. 끝이 없는 깨달음이 이어지게 됩니다.
다만 견성 이전과 견성 이후는 길이 서로 다릅니다. 견성 이전이 일반도로를 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견성 이후는 고속도로를 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호등에 걸려 막힐 일이 없습니다. 견성 후 처음엔 할 일이 없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나 결코 할 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견성이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바심이 아닌 느긋한 마음속에서 계속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견성의 흥분이 가라앉고 나면 새로운 의문이 생기기도 하고 새로운 깨달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견성이란 내가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느껴 안 때일 뿐입니다. 견성 후에도 내가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지기도 하며, 깨달음이 보다 안정되기도 합니다. 내가 무엇인지에 대한 앎을 단 한 번의 견성으로 모든 것을 다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견성은 깨달음의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을 부디 잊지 마세요. / 김신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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