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소승적 무아(無我)와 대승적 무아

신타나 2025. 12. 30. 14:13

소승적 무아(無我)와 대승적 무아


모든 게 파란색이라면 특별히 파란색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하늘도 땅도 산도 강도 모두가 파란색일 때, 파란색이라는 게 있다는 걸 우리는 결코 쉽게 알 수 없음이다.
이처럼 모든 게 파란색일 때는 특별히 파란색이라고 할 게 없다는 것, 즉 특별히 나라고 할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바로 첫 번째 깨달음이며, 여기서 더 나아가 모든 게 파란색이라는 것 즉 모든 게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두 번째 깨달음이다.

이처럼 나라는 게 없다는 것에 방점을 두는 첫 번째 깨달음을 나는 소승적 무아라 이름하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게 나라는 것에 방점을 두는 두 번째 깨달음을 나는 대승적 무아라고 이름한다.
그런데 소승과 대승이라는 말만 두고 보면 소승보다 대승이 무언가 더 나을 것 같지만, 소승적 무아에 대한 깨달음 없이 대승적 무아에 대한 깨달음이 있을 수는 없다. 달리 비유하자면 180도 지점을 지나지 않고 360도 지점으로 갈 수 없음과 같다.

처음 깨달았을 때는 산이 산이 아니었고 물이 물이 아니었으나, 두 번째 다시 깨닫고 보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임을 알겠더라는 중국 당·송 시대 청원 유신 선사의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다른 비유로는 집을 지을 때 1층을 먼저 짓지 않으면, 2층을 지을 수 없다는 말 또한 이를 나타낸다. 즉 소승적 깨달음을 거치지 않고서는 대승적 깨달음에 닿을 수 없다는 말이다.

고로 소승과 대승을 두고 서로 자기네 승단의 이념이 우월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논쟁이 아닐 수 없다. 1층보다 2층이 낫기는 하겠지만 즉 소승보다 대승의 이념이 낫지만, 소승적 깨달음을 거치지 않은 대승적 깨달음이란 있을 수 없는 공염불이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모든 게 파란색이라면 특별히 파란색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라는 명제를 다시 살펴보자. '특별히 파란색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라는 앎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아에 대한 깨달음이자 공 체험인 것이다. 이러한 초견성에서 우리는 '텅 빈 침묵'을 느끼게 된다. 나라는 게 없고 세상천지가 모두 텅 빈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초견성이며 소승적 무아일 뿐이다. 깨달았다는 흥분의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 다시 오랫동안 사유하는 시간을 거치다 보면 '모든 게 파란색이라면'이라는 전제(前提)가 점차 다가오기 시작한다. 파란색이 없는 게 아니라, 모든 게 파란색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파란색 즉 나라고 할 수 없음을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즉 무아라는 게 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게 나이기에 어느 하나를 나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임을 또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모든 게 나이기에 어느 하나를 나라고 할 수 없음이 바로 대승적 무아이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몸과, 그러한 몸과 늘 함께하는 마음 그리고 마음이라는 바탕 위에서 뛰어노는 지성을 합한 이것이 내가 아니어서 무아(이게 바로 소승적 무아)라고 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게 나이기에 어느 하나를 나라고 할 수 없으므로 무아라고 하는 것임을 깨닫는 게 바로 대승적 무아인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이러한 대승적 무아에 대한 깨달음은, 소승적 무아에 대한 깨달음 없이는 다다를 수 없다. 따라서 소승과 대승이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게 아니라, 다함께 손을 잡고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인 것이다. 고로 부디 대승이라는 명색에 사로잡혀, 1층도 짓지 않은 채 이층집을 짓겠다는 어리석은 욕심을 부리지는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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