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걷기 건강법

신타나 2025. 2. 16. 12:35

걷기 건강법


"나무가 늙으면 뿌리가 먼저 마르고, 사람이 늙으면 다리가 먼저 쇠약해진다"는 뜻인,
"수노근선고 인노퇴선쇠  老根先枯 人老腿先衰" 라는 옛말을 자세히 설명하는 영상을 보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70살이 넘은 노인들이 한 번에 쉬지 않고 4km를 걸을 수 있으면, 그렇지 못한 또래의 노인들보다 6년 이상 더 오래 살 수 있다는 내용의 영상 글을 보고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몇 년 더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래보다 몇 년 더 오래 사는 것에 무슨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죽는 것보다 몇 년 뒤 죽으면 뭐가 더 좋을까? 중요한 것은 지금 죽으나 나중 죽으나, 살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며 사느냐일 것이다. 오감에 의한 외부에서의 즐거움보다 잔잔히 흐르는 내면에서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가 백 년을 지나 이백 년을 살든 삼백 년을 살든 무슨 상관이랴.

하지만 타인과 비교하며 살다가 느끼는 기쁨과 고통의 삶이라면, 지금보다 10년 전에 이미 죽었으나 10년 후에 죽는 것이나, 아니면 지금 당장 갑작스레 죽음이 닥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기쁨과 고통이 반복되는 것이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이나 하나도 다를 바 없다고 본다. 깊은 산 속 돌 틈에서 흐르는 고요한 샘물이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몸의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건강한 몸으로 스스로 오늘을 산다는 말과,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몇 년을 더 산다는 말은 어감이 꽤 다르게 느껴진다. 우리가 지구상에 내려와 삶을 살아가는 목적이 10년을 더 살고 20년을 더 사는 게 아니라, 건강한 몸과 흘러넘치는 마음속 기쁨으로 오늘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이가 칠십이 넘어서도 걷기 운동 등 꾸준히 몸을 단련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 이유가 수명을 몇 년 더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칠십 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왔다면, 지금 당장 죽든 지금부터 백 년 후에 죽든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다. 여기서 얼마의 시간을 더 산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지는 것도 별로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정한 나이가 되면 더 살 가치가 없다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기간이라는 형식에 해당하는 신체적 수명이 아니라, 삶에서의 내용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느낌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단상 또는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 하나 더 생긴다는 것  (0) 2025.02.18
행복  (0) 2025.02.18
나임에 감사합니다 / 신임에 감사합니다  (0) 2025.02.13
영원한 현역과 자발적 백수  (0) 2025.02.08
초자아적 사랑  (0) 2025.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