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잠결, 열려진 창문 사이로 들려오는 칠월 장마철의 세찬 빗소리는 시원한 아침을 예고한다. 세상의 어느 한 모퉁이가 떠내려갈 것 같은 두려움도 없지 않지만 장마철 빗소리는 늘 시원하다.
우리는 흔히 지나간 일상에 대한 기억을 잊고 산다. 어린 시절 여름날이면 마당에 깔린 멍석이나 들마루에 둘러 앉아 저녁을 먹고, 부채 부치며 두런두런 얘기를 듣던 졸음에 겨운 어린 추억들, 그때는 일상이었지만 삼사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추억이다.
소낙비 내리고 나면 집 앞 도랑에 솟구치며 흐르던 흙탕물, 초등학교 1학년 시절 학교 끝나고 집으로 오던 중 눈앞을 지나는 섬광과 귓전에서 ‘꽝’하며 때리는 천둥소리에 놀라 바로 옆에 있는 주막집으로 무작정 뛰어 들던 기억, 지금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수건으로 머리에 젖은 물기를 닦아 주시던 그 집 아주머니의 손길.
며칠 지난 후 동네 형으로부터 들었던, 근처 누구네 집이 벼락 맞았다는 전설 같은 소문과 그 때 내 머리 위로 지나간 그 번갯불이 아마도 그 집에 벼락이 되었을 것이라는 두려웠던 기억.
중학교 때쯤 학교에서 단체로 보았던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영화에서, 방금 전 소낙비가 그친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의 영롱함, 그것을 바라보는 어린 주인공의 모습, 같은 영화에서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대학생들에게 일본이 벌인 태평양전쟁의 무모함을 역설하면서도 자신이 먼저 전쟁터로 나가 결국 죽음을 암시하는 흑백사진으로 바뀌는 어느 대학교수의 얼굴.
장마철 빗소리는 쉬 잦아들지 않고 끈질기게 이어진다. 지하층이나 저지대에 사는 사람이라면 근심으로 다가오리라. 벼농사를 짓는 농부도 한가하게 빗소리를 듣고 있을 여유가 없이 빗속에라도 논으로 나가 물꼬를 터 주어야 할 것이며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인 일용근로자는 아침부터 시름에 젖으리라.
출근 시간이 가까워진다. 상념을 접고 일상으로 나가야겠다. 앞으로 삼사십년 후 그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이 될지라도 지금의 나에게는 일상이므로....
2009년 7월 7일 자란 김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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