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지금 여기

신타나 2021. 11. 18. 22:35

지금 여기


날마다 장면이 새롭게 바뀌는 현실이라는 영화.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끊임이 없이 상영되고 있지만, 현재 역시 영원하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 연극 무대 (또는 스크린)이다. 우리의 삶이 끊기지 않는 현실인 것처럼, 우리의 의식(또는 생명) 역시 끊어지지 않는 현재이다.

우리에게 삶과 의식은 영원히 상영되는 영화인 동시에 무대인 셈이다. 어쩌면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곧 지금이자 여기일 수도 있음이다. 영화에 비유하자면, 스크린과 영화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일체형이라고나 할까. 우리가 영화를 볼 때처럼 스크린이라는 게 별도로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마치 홀로그램처럼.

무대나 스크린에 해당하는 우리 의식도 영원하지만, 영화에 해당하는 우리 삶도 영원하다. 의식과 삶이 분리된 게 아니라 일체 즉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삶에서 때때로 죽음 또는 종말을 맞는 장면이 나타난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 살아있음이다. 이게 바로 영원한 생명 즉 영생 永生이다.

그리고 일정한 자격과 조건이 되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애초부터 영생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즉 인간 몸으로의 탄생 이전 영혼으로 존재할 때부터 우리는 영생하는 존재인데, 잠시 육체라는 옷을 입고 태어났다가 옷을 벗어버리고 다시 영적 존재로 돌아가는 과정을, 태어남과 죽음이라고 이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육체적인 삶 또는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우리는 늘 살아있는 영적 존재이다. 이처럼 우리가 유형의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무형의 영적 존재임을 자각하는 게 바로 깨달음이다. 그런데 두뇌에서의 인식에 그치지 않고 몸으로 체득이 되었을 때, 비로소 깨달음을 제대로 얻었다고 할 것이다.

두뇌에서의 인식을 견성이라고 한다면, 몸으로 체득되는 과정이 곧 보림이다. 따라서 견성성불이라는 용어보다는 견성보림이라는 용어가 더 절차적 순서에 맞다고 할 것이다. 보림이 끝난 다음에야 비로소 성불에 대한 얘기를 꺼낼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이는 히말라야 고봉 등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고봉 등정에 성공한 것이 견성이라면, 사고 없이 무사히 하산하는 과정이 바로 보림이다. 하산하는 과정에서 조난당해 실종되었다면 그가 고봉 등정에 성공한 것일까? 실종되지 않고 살아 돌아와야 등정에 성공한 것 아닐까?

정신적으로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에 있어서, 보림 과정에서 깨달음이 사라졌다면 이는 하산하다가 조난당한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보림 과정을 통해 제대로 깨달았다면,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다시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견성 못지 않게 보림도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하산 과정에도 고봉 등정에서와 똑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므로.

따라서 견성성불 즉 견성이 곧 성불이라는 얘기는, 고봉에 깃발만 꽂으면 등정 성공이라는 얘기와 다를 바 하나 없다. 그러나 하산 중에 조난당해서 실종됐다면 그게 무슨 성공이란 말인가. 마찬가지로 견성 후에 깨달음이 도로 사라졌다면 그게 무슨 성불이란 말인가.

그러니 적어도 베이스캠프까지 안전하게 도착한 뒤에 등정 성공을 얘기하자. 이와 마찬가지로 보림을 완전히 끝낸 후에 성불을 얘기하자. 견성성불이란 견성의 환희에 빠져 미리 축배를 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속세로 다시 내려오지 않고 눈 덮인 산정에 계속 머물 생각이라면 모르겠지만.

또한 이렇게 해서 우리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해도, 거기가 곧 깨달음의 끝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계속 진화하고 진보해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절대자인 신이 계속 진화하고 진보해나가는 존재인 것처럼. 그리고 여기에 영생의 기쁨이 담겨있다. 중간 어디쯤에서 멈춘다면 영생이란 오히려 고통이 될 것이다.

멈추는 순간부터 우리는 권태를 느끼게 될 것이며, 죽을 수조차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몸서리치는 고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신은 사랑일뿐더러 누구보다도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에, 자신의 일부분인 우리 인간에게 권태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영원한 변화와 진보가 있을 뿐이다.

결국 지금 여기라는 게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게 여기서 내가 주장하는 바이다. 우리는 무대(스크린)인 동시에 영화이며, 또한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기도 하다. 내가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고 있음이다. 우리가 신의 부분인 동시에 신 자신이기도 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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