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에서 부분으로
우리가 하게 되는 생각은 부분인 나에게서 생겨나는 게 아니라, 전체인 신으로부터 부분인 내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내가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 역시, 깨달음이 내 몸 마음 영혼 안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전체에서 부분인 내 안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즉 내가 하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나란 즉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이란 하나의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인 신으로부터 모두에게 떨어져 내리는, 깨달음의 빗물을 담을 수 있는 통이 바로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일 뿐이다.
깨달음에도 철학자 헤겔이 말한 정반합의 원리가 적용된다. 정 正이 우리가 지금 보는 바와 같이 물질세계(색)라면, 반 反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세계(공)인 것이다. 우리는 대개 물질세계가 전부인 것으로 여기며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 세상이 텅 비었다는 사실이,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오기도 한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깨달음 또는 견성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우리의 오감을 통해 느껴지고 보이는 모든 게 허상이자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뚱아리가 환상이며, 저 앞에 보이는 산이 허상이라는 주장을 서슴없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물질인 이 몸도 아니며,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빔도 아니다. 우리의 몸을 비롯한 물질과,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 합쳐진 그 모든 것이 바로 나이다. 정과 반은 각기 반쪽을 나타내고 있으며, 정과 반의 합인 합일 合一이 곧 나인 것이다. 합일이란 자신과 타인의 몸을 비롯한 모든 물질과,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 하나로 합쳐진 상태를 말하며, 이러한 합일의 상태에서 비로소 나를 느낄 수 있음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나라는 게 너무 큰 존재로 느껴지고 뭔가 안 맞는 옷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맞다. 우리는 이렇게 큰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국민이라는 단어를 한번 생각해 보자. 국민이라는 말은 한 나라의 구성원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국가의 구성원 개개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라는 단어가 바로 그렇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바처럼 나란 자기 자신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상에 있는 모든 인간 즉 모든 사람이 바로 나이기도 한 것이다. 나 아닌 사람이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과 타인의 몸을 비롯한 모든 물질과,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 하나로 합쳐진 그 모든 게 곧 나인 것이다. 나 아닌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질 우주와 형이상학적 우주를 망라한 온 우주에 나 아닌 것이 없음이다. 따라서 우리의 통상적인 생각 속에 있는 '개체로서의 나'는 '전체로서의 나'의 부분이다. 다른 예를 든다면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가 곧 몸이고 몸이 곧 세포이지만, 세포는 몸의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쯤에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인 무아 無我를 떠올려보자. 석가모니는 왜 무아라고 했을까? 글자 그대로 내가 없다는 뜻일까? 아니다. 내가 없다는 게 아니라, 모든 게 나이므로 개체인 나라고 주장할 게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정신세계인 정(正)의 단계에서 생각하는, 육체로서의 (또는 개체로서의)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게 바로 무아의 뜻이다. 마찬가지로 반(反)의 단계인 텅 빈 형이상학적 세계에는 당연히 나라는 게 없다. 반의 단계에서는 모든 게 텅 빈 공 空이자 환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정과 반을 거쳐 합(合)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체인 신(또는 붓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으며, 신 안에서 부분인 나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음이다. 전체가 없는 부분이란 있을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부분이 없는 전체 역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신이 없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인간이 없는 신 또한 있을 수 없음이다. 고로 유대교 바이블과 이를 차용한 기독교 구약 시편에 나오는 내용인, "고요히 있으라, 그리고 내가 신임을 알라."에서 '나'는, 신을 뜻함과 동시에 우리 인간 개개인을 뜻한다.
만일 여기서 '나'라는 단어가 신만을 뜻하는 것이라면, 시편에서의 이 구절은 "신이 신임을 알라"는 아무런 맥락이 없는 문장이 되고 만다. 따라서 시편 구절은 우리 인간 모두가 바로 신이라는 뜻이다. 다만 우리 개개인이 신흥 종교의 교주가 되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신 안에서 신일 뿐이며, 전체이자 하나인 신에게 순종하는 '부분으로서의 신'이라는 뜻이다.
독립된 개체로서의 내가 없다는 게 바로 석가모니 말씀인 무아의 뜻이다. 그러나 독립된 개체가 아닌 전체의 부분인 나까지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 글을 쓰거나 읽을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른바 깨달은 사람 중에는 아직 합의 단계가 아닌, 여전히 반의 단계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깨달은 사람 중에는 숭산 스님이 말씀했다는 360도가 아닌 180도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있으며, 중국 송나라 시대 청원 선사의 말씀을 리바이벌한 성철 스님의 말씀처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에 아직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여전히 있다.
아직도 산이 산이 아니요 물이 물이 아니라는 처음 견성의 경지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한 번 더 나아가야 한다. 180도를 거쳐 360도 즉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며, 첫 견성을 거쳐 다시 산은 산이며 물은 물임을 아는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이 공이고 허상이며 허망한 게 아니라, 물질세계와 공의 세계가 합일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며, 그게 바로 신이고 그 안에 내가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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