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91

이 깨달음을 세상에 전하는 데 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으리라

이 깨달음을 세상에 전하는 데 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으리라불경에 나오는 '살생하지 말라'는 말씀도, 바이블에 나오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도, 모두가 다른 생명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다. 방안에 기어다니는 벌레를 종이에 싸서 죽이는 것도 그 벌레 자체가 두려운 것이든, 벌레로부터 옮길지도 모르는 병균이 두려운 것이든 암튼 두려움에 의한 행동이다.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두려움이 없다면 벌레를 방 안에 돌아다니게 그대로 두던가 아니면, 죽이지 않고 방 밖으로 내보내던가 할 것이다.이상에서 보듯이 다른 생명을 죽이는 행동은 두렵기 때문이며, 종교 경전마다 나오는 살생과 살인을 하지말라는 말씀도 결국은 "나 아닌 다른 생명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동물을 음식물로 섭쥐하든..

주체로서 대상을 사랑하자

주체로서 대상을 사랑하자대상 또는 객체가 존재한다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게 지금 여기 존재함에 감사하자. 나와 함께하는 몸이 지금 여기 있음에, 물건이 있음에 그냥 감사하자. 심지어 자동차나 물건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고 해도, 그게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내 몸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든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곧 기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위해서 대상을 사랑하는 주체가 되자.

사람은 내게 그럴 수 있어도 신은 내게 그러하지 않는다

사람은 내게 그럴 수 있어도 신은 내게 그러하지 않는다 한글 맞춤법 검사기가 몇 번을 거듭해도 얼른 뜨지 않길래, 혹시 누군가가 내 폰에 악성 앱을 깔아서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이내 "사람은 내게 그럴 수 있어도, 신은 내게 그러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신은 언제나 내 편'이라는 생각이 나를 편안하게 만든다.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내 편이 아닐 때 있었지만, 지금은 신이 내 편이기 때문에 그 누가 뭐라 해도 상관없을 것 같은 심정이다. 사람은 내게 그럴 수 있어도, 신은 내게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내 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사랑과 두려움

영혼의 사랑과 두려움 1 우리 인간 영혼은 하늘에 비유할 수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곧 영혼이다. 그런데 영혼이 몸과 함께 지상으로 태어날 때 영혼의 모습 그대로 태어나지 않고, 마치 파란 하늘에 덮인 구름처럼 두려움이라는 마음이 사랑으로 이루어진 영혼 위에 덮이기 시작한다. 왜 그럴까? 왜 영혼 그대로의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고 마음이라는 구름에 덮인 상태로 태어날까? 그것은 바로 영혼의 모습인 사랑을 느끼고 깨닫기 위함이다. 즉 처음부터 우리가 파란 하늘만 보아왔고 지금도 변치 않는 파란 하늘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느낌이 있을 수 없다. 즉 그것이 파란지 빨간지 좋은지 나쁜지 등등 아무런 느낌도 갖지 못한다. 그래서 느낌과 깨달음의 기쁨을 얻기 위하여, 즉 구름이 걷힌 다음 ..

기차 안에서의 단상

기차 안에서의 단상 같은 기차에 탄 남모르는 사람조차, 나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게 아니라 고마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덕분에 내가 기차를 탈 수 있고, 나아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 혼자서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의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르는 사람들을 소 닭 쳐다보듯 할 게 아니라, 마음속으로 '고마운 사람이다.' '저 사람들 때문에 내가 살아갈 수 있음이다.'라는 생각을 평소에 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이 좋은 게 아니라 자신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날 것입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함께 우리 마음도 많이 가벼워질 것입니다.

위빠사나 명상이란...

위빠사나 명상이란...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객관적으로 즉 타인의 일처럼 다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 명상에서 강조하는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의 의미이다. 추위와 더위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춥다 - 덥다'라는 감각과, 추위 또는 더위에 대하여 마음에서 일어나는 '싫다 - 좋다'라는 감정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어떠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이러한 감각과 감정을 알아챈 다음 아무런 행동 없이 다만, 그것을 지켜보는 과정을 일정 시간 지속하는 것을 위빠사나 명상 내지 수행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위빠사나 명상의 목적은 무엇일까? 더운 여름날 모기가 물어도 손으로 내쫓지 않고 그냥 참고 앉아 있지만, 참을성을 기르는 게 위..

감각+감정=느낌

감각에 감정이 더해진 것이 바로 느낌이다. 느낌을 찬찬히 살펴보면 거기에 어떤 이미지 즉 상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느낌 안에는 해당 이미지에 대한 좋거나 싫은 감정도 들어있음이 보일 것이다. 이처럼 감각과 감정이란, 느낌이라는 동전의 양면을 각각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을 속이거나 또는 스스로 속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감각과 이미지(상)의 합인 느낌이다. 또한 느낌은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이라는 기억의 창고에 영원히 저장된다. 그리고 영원히 저장되는 기억은 물질이 되어 현실로 나타났을 때 비로소 사라진다. 따라서 현실에 나타난 모든 것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무상하게 사라지고 만다. 잠재의식에서 기억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고로 우주에 존재하는 유형적인 모든 건 다름 아닌 잠재..

오늘의 한마디 3

한마디로 우리의 삶이란 '나를 알아가는 것'이며 따라서 삶의 목적은 '나를 아는 것'이다. 일찍이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 청년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라고 외쳤으나 스스로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굳이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아도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 흔히 얘기하는 이른바 깨달음이라는 단어도 결국 자기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아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깨달음이란 마라톤 완주 테이프를 통과하듯이 어느 한 지점을 통과하는 순간 모든 것이 이해되고 깨달아지는 게 아니라 평지에서 높이를 더해 봉우리가 되고 산이 되며 얕은 물이 깊이를 더해 강이 되고 바다가 되듯이 그렇게 깨달음이 쌓여가는 것이다. 깨달음이 쌓여갈수록 점차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알..

오늘의 한 마디 2

나는 진화론자에게 묻고 싶다. 생명체가 스스로 진화했다면 진화의 법칙도 스스로 진화된 것인가? 그렇다면 이는 누군가가 깔아놓은 레일 위를 달리는 게 아니라 레일을 깔면서 동시에 멈추지 않고 기차가 달릴 수 있다는 얘기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또한 나는 창조론자에게 묻고 싶다. 모든 생명체가 진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그리고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진화의 법칙은 누가 만들었겠는가? 진화론을 거부하는 것은 신이 창조한 진화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도 신의 이름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