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91

지상에 온 이유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이나 시험조차도 신의 사랑임을 깨달아야 한다. 신의 사랑이 아닌 게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고통의 바다라고 하는 우리의 삶조차도 신의 사랑이다. 신이 인간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 무엇 하러 우리에게 세상 체험을 하도록 했겠는가? 우리 자신이 원하고 또한 신이 원해서 이루어진 일일 뿐이다. 천상에서 천사였던 우리 인간이, 고해라고 불리는 이 지상으로 내려온 이유란 말이다.

둥근 하늘, 둥근 지구

둥근 하늘, 둥근 지구 내 안에 있는 하늘에서 사랑의 빗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밖에서 사랑이 얻어지는 게 아니며, 하늘이라는 것 역시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 하늘이 있고 하늘의 사랑이 있으며, 내면에 있는 하늘의 사랑이 지상의 모든 것을 감싸고 있다. 지구가 둥근 것처럼 하늘도 둥글다. 지상이 평평하게 보이지만 실은 둥근 것처럼, 하늘도 평평한 게 아니라 지평선 또는 수평선 너머에서 지구를 둥글게 감싸고 있다. 북극에도 하늘이 있고 남극에도 하늘이 있으며, 태평양과 대서양, 인도양 위에서도 하늘이 보일 테니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

내가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이 모든 게 당신의 작품이군요. 하긴 글을 쓰거나 말을 하기 전, 나는 당신의 말씀을 기다렸으니까요. 그러고도 당신이 아닌 내가 그런 흡족한 글을 썼다고 혼자 자뻑했답니다. 그나마 당신의 사랑이 있기에 나와 같은 웃기는 짬뽕이,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머리를 쥐어짜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나도,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해주길 기다릴 줄 아는 놈입니다. 이 정도로도 내 마음은 기쁨 가득합니다. 아무튼 오늘도 당신의 사랑을 조금 더 깨닫게 되는 하루입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 신이시여!

수용과 거부 그리고 선택 (사랑, 두려움, 자유의지)

수용(사랑), 거부(두려움) 그리고 선택(자유의지) 나는 천사일 수도 있고 악마일 수도 있다. 이렇게 양변을 모두 수용하는 게 바로 중도이자 중용이다. 양변을 잘라 없애고 가운데 있는 어느 한 지점만을 선택하는 건, 중도나 중용이 아니라 하나의 부분일 뿐이다. 풍요와 가난도 마찬가지다. 나는 부자일 수도 있고 가난뱅이일 수도 있다는 허용과 인정 즉 받아들임(수용)이 필요하다. 건강과 병약도 마찬가지로 양쪽 모두를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가운데 건강을 선택하는 것이지, 그러지 않고 어느 한쪽인 건강과 풍요 그리고 천사만을 수용하고 다른 한쪽을 거부하는 건, 가운데 있는 길을 걷는 게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친 길을 걷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선택은 밖에 있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안에 있는 마음에서 ..

보물찾기

보물찾기 태초에 생각, 말(말씀), 움직임이 있었다. 여기서 움직임이란, 무형 無形인 생각과 말이 고정된 게 아니라 유동적이라는 뜻이다. 또한 생각을 '의식'으로, 그리고 말을 '소리'라는 단어로 바꾸어도 상관없다. '태초에 우리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 있었을 뿐 아니라, 무형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있었으며, 역시 무형의 존재임에도 고정됨이 아닌 움직임이 있었다'라고 이를 바꾸어 써도 적절할 것이다. 물질 우주 이전부터 존재하는 무형의 세계에서 우리는, 자신이 존재함을 의식하는 능력과 스스로 말을 할 수 있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무형임에도 무언가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태초부터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무형의 세계가 바로 우리의 내면이다. 지금 우리에게 눈..

정체성의 꼰대

정체성의 꼰대 4번의 허물을 벗으면서 약 25일간 몸집이 10,000 배 정도 자란다는 누에처럼, 사람도 유치원에서부터 입학과 졸업을 반복하며 육체적, 정신적 성장을 거듭한다. 다만 누에 등 다른 동물과 달리 사람은 한때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넉잠 자고 난 누에가 스스로 자신을 가두기 위해 누에고치를 짓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정체성 확립의 시기인 청소년기가 있다. 누에가 고치 안에서 번데기로 성장하듯, 사람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다음 확립된 정체성 안에서 정신적 안정과 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번데기가 되었을 때 누에는, 고치 안에서 계속 번데기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나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방이 되어 고치를 뚫고 밖으로 나오게 된다. 반면 사람의 경우에는 누에와 달리, 정신적인 누에고..

몸에 밴다는 말

몸에 밴다는 말 예전에 탔던 자전거나 스케이트를 몇십 년이 지난 다음 다시 탈 경우에도, 타는 방법을 잊어버리지 않았을 때 우리는 이를 몸이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조금만 깊게 생각해본다면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몇십 년은 고사하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모든 세포가 교체된다. 몸이 예전의 몸이 아닌데 어떻게 몸이 기억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몸이 여전히 예전의 몸과 같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착각의 산물이다. 근육은 말할 것도 없이 뼈조차도 6개월이면 모든 세포가 새롭게 바뀐다는 게 과학이 밝혀낸 지식인데, 우리는 이를 망각하고 있음이다.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거의 망각하는 채로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 덕분에 우리는 몇십 년 전에 몸에 익혔던 일을, 처음 배울 때와 같은 ..

시간의 광야

시간의 광야 우리는 흔히 시간을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는 선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렇다. 더욱이 현재는 장구한 과거와 안갯속 같은 미래 사이에 있는 아주 짧은 순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그랬다. 그러나 60대에 들어서면서 내게는 현재가 찰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현재라는 순간을 스치듯 지나가면 과거가 되는 게 아니라, 벌판처럼 펼쳐진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어느 한 지점의 기억을 과거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과거라고 부르는 현재와 미래라고 부르는 현재가 있을 뿐, 과거와 미래란 있을 수 없다. 지평선이 보이는 현재라는 광야에서, 저 멀리 기억나는 한 지점을 과거라고 여기지만, 그 모든 곳은 하나도 빠짐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