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79

생리와 심리와 윤리에 대하여

생리와 심리와 윤리에 대하여 (고미숙 고전평론가의 글을 보고) 윤리란 자기규정일 뿐이다. 우리는 흔히 윤리가 사회 또는 하늘에서 정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윤리란 각자의 의식 안에서 만들어진다. 물론 타인의 말이나 글을 참고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혼자 독단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기에 윤리가 외부 세계에 있는 것으로 느껴지지만, 외부에 있는 타인의 언행을 참고해서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자신이 만든 윤리에 대한 자기규정 (우리는 이를 관념이라고 칭한다)에 따른 행동이, 타인의 윤리 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타인의 행동이 또한 내 윤리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식이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처럼 서로 연결된 구조다. 결론적으로 윤리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명령도 아니며, 또한 어느 한 사람..

고정관념과 믿음에 대한 단상

고정관념과 믿음에 대한 단상 고정관념의 다른 이름은 믿음이다 믿음을 아무리 포장지로 포장해도 단단하게 고정된 관념일 따름이다 달리 말하면 화석화된 기억이거나 그러나 고정관념이든 믿음이든 무조건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현실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드는 믿음이라면 얼마나 좋은가 믿음을 보다 굳건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애를 써왔던가 따라서 고정관념이든 믿음이든 이름을 가지고 따질 게 아니라 삶에 유용한가 아닌가를 따져 버려야 할 건 아낌없이 버리고 간직할 건 간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고정관념이든 믿음이든 믿음이 곧 고정관념이며 고정관념이 곧 믿음임을 바로 알아 믿음과 고정관념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일이다

실체와 허상

실체와 허상 우리는 자기 신체의 오감을 통해서 지각되는 대상이 실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것을 실체라고 믿기도 하는데 이는 착각일 뿐입니다. 오감의 대상은 수시로 변하는 것이자, 실체가 아니라 잠시 동안 실존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결국에는 사라져버리는 허상 또는 환영일 뿐이죠. 그리고 정말로 변하지 않고 영원히 실재하는 실체는 바로, 무 無 또는 텅 빈 침묵인 나 (또는 참나)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한다면 「유 有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 無가 존재해야 한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모든 것이 유형의 바탕 위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는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착각입니다. 지구와 태양 등 우주를 생각해본다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단단한 땅 즉 지구가..

생각

생각 생각이란 한자어로 오인되기도 하는 순우리말이다. 그런데 생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생각은 생각의 대상을 만들어내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생각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대상이나 다른 주제를 생각하는 게 아닌, 자기가 하고 있는 생각 자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생각의 쳇바퀴에 갇혀버리게 된다. 이게 바로 청소년기에 흔히 겪게 되는 아노미 현상이다. 이는 청소년에게만이 아니라, 영성에 관심을 두고 명상을 하거나 사색에 깊이 빠지는 사람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영성에서는 생각 자체가 아니라, 생각하는 나는 무엇일까 또는 나는 누구인가를 숙고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를 상기증 또는 상기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생각..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으로 가는 길 우리 앞에 일어난 모든 일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언제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지금 잘 모른다 해도) 이미 일어난 모든 일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어난 일로 생각해봅시다.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이 자신을 위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을 뿐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교도소 안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예를 들어 자유롭게 어딘가 밖에 여행 갔다가 교통사고가 났다면, 우리는 집에 가만히 있었다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어떤 일이 자신을 위하여 일어나는 일인지 알 수 없으므로, 내 앞에 일어난 일을 무조건 날 위해서 일어난 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

인드라망

인드라망 인드라망이란 밖에 있는 무엇이 하나로 연결되는 게 아니라, 우리 각자의 내면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모습이다. 따라서 인드라망이란 눈에 보이지 않으며 형상이 없는 것임에도, 이를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일 뿐이다. 고로 이와 같이 그림으로 나타내는 설명은 진실을 오히려 왜곡시키기도 한다. 무형의 관념을 이해하기 쉽도록 유형으로 나타내는 것은, 이해를 돕는 면도 있지만 이해를 그르치는 면도 있음이다.

신의 사랑과 인간의 저주

신의 사랑과 인간의 저주 신은 우리 중 누구 할 것 없이 모두를 사랑한다. 다만 우리 스스로 신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할 뿐이다. 그러나 신이 왜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사랑하지 않겠는가? 잘못을 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생각해 보라. 신의 눈으로 볼 때 인간에게 잘못이 있을 수 있겠는가를.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분명 선행과 악행이 따로 있을 수 있지만, 무소부재하고 전지전능한 능력의 신이, 인간의 행동에서 무슨 잘못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죄와 악이란 신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일 뿐임을 우리 모두 자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몸을 죽음에서 부활시키는 능력의 신에게, 살인이 무슨 의미를 가진단 말인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는 신에게 도둑질이 무슨 죄가..

욕망

욕망 스스로 내가 원하는 걸까? 아니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나도 같이 원하는 걸까? 나 자신을 돌이켜 볼 때, 예전에는 후자였으나 지금은 전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스스로 원하는 것은 대부분 이루어지지만, 타인이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할 때는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나는 깨닫는다. 욕망의 대부분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질 때, 또한 우리는 자유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걸까? 스스로 내가 원한다는 말! 뭔가 독립적이고 자주적이며 주체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종속적인 배움을 통해서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주체가 될 수 있음이다. 종속을 거치지 않은 자주란 있을 수 없다. 다만 계속하여 종속적일 수 있으며, 비교적 빨리..

중도 中道

중도 中道 내가 원하는 일과 실제로 일어나는 일. 이 모두를 받아들이는 게 중도다. 중도란 내가 원하는 일과 실제로 일어나는 일 사이에서 어느 중간쯤을 받아들이는 게 아닌, 양쪽 모두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다. 그리고 원하는 일과 실제로 일어나는 일뿐만 아니라, 선과 악, 빛과 어둠, 정의와 불의 등등 상대적인 대상 모두를 수용하는 게 바로 중도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어느 일면만이 아닌, 양면 모두가 존재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다만 양면을 모두 받아들이면서도, 어느 한 면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삶이기도 하다. 달리 얘기하자면 마음으로는 모든 걸 받아들이되, 몸으로는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서 행할 수밖에 없다. 몸으로 중간을 선택하거나 또는 어느 한 편을 선택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

내면세계에 대한 패러다임

내면세계에 대한 패러다임 잠자면서 꿈을 꿀 때는 자신이 꿈속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잠을 깨고 보면 오히려 꿈속 세계가 자신에게 일어난 한 부분으로 느껴진다. 깨어남 또는 깨달음이 바로 이와 같다. 평소 일상을 살아갈 때는 자신이 세상의 한 부분으로 느껴지지만, 깨닫고 나면 오히려 세상이 자신의 한 부분으로 느껴진다. 이처럼 인식의 전환 또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바로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깨어남이나 깨우침 등 다른 말로 표현해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용어가 아니라, 인식의 전환 즉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이다. 한마디로 깨달음이란 자신이 이 세상에서 부분으로서 즉 개체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저마다 자신이 전체이자 전부임을 확연히 느끼는 것이다. 아울러 자신의 몸이 곧 자신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