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받아들임이란?

신타나몽해 2022. 2. 10. 11:00

받아들임이란?


사랑이란 받아들임입니다. 여기서 받아들임이란, 내 앞에서 일어나는 일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까지 즉, 외부 세계의 모든 일과 내면에서의 모든 반응을  하나도 빠짐없이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또 달리 표현하면 나와 남의 말과 행동은 물론이며,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조차 모두 받아들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겠죠?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는 지점 하나를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깨달은 사람이라면 타인의 언행이나 일어난 사건이나 사고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며 초연해야 한다고 우리는 흔히 알고 있고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이 그렇고 노자 또는 도가의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임과 반응의 순서가 중요함을 일깨우고자 합니다. 보통의 우리에게는 반응이 먼저입니다. 먼저 반응한 다음 시간이 흐른 뒤에, 지나간 기억을 받아들이거나 후회 또는 반성을 합니다. 아니면 어떠한 사람이나 사건은 죽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도 하죠.

그러나 받아들임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우선 받아들인 다음 비로소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우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반응을 먼저 하곤 합니다. 두려움에 의한 반응이 앞서고 사랑에 의한 받아들임이 나중인 것이, 우리 대다수의 모습이자 보통의 삶입니다. 받아들임이 우선이고 반응이 나중일 때 우리는 이를 깨달은 사람의 모습이자 사랑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이거나 성자라고 해서 아무런 반응도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닌 나무토막이거나 바윗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욕을 하거나 비난을 해도, 그가 하는 말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어리석은 가르침일 뿐입니다. 몸을 지닌 인간은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속담이 있는 것 아닐까요?

다만 이성적 판단 없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존재가 다른 동물이나 식물 또는 무생물이라면, 아무런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경우도 가끔 있기는 하지만, 인간은 대개의 경우 이성적 판단을 거친 다음 반응을 합니다. 이러한 반응 때문에 우리는 고해의 삶을 살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언행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튼 지금 우리는 반응한 다음에 받아들임이라는 평지에서, 받아들인 다음 반응이라는 눈 덮인 산정을 향해 올라가고자 애쓰고 있는 범인입니다.

받아들임 후에 반응이라는 산정! 이게 바로 견성이며 깨달음의 시작점입니다. 그런데 받아들인 다음에 반응이 일어나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고 해서 온전히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닙니다. 거기서부터 보림이라는 하산 과정이 다시 시작됩니다. 올라갈 때보다 쉽기는 하지만 여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하산 과정에서부터 받아들임이 반응보다 먼저 일어나는 마음 자세가 점차 체화되기 시작합니다. 이게 바로 점수 漸修입니다.

반응보다 받아들임이 먼저 일어나는 경우가 통계적으로 50%를 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베이스캠프에 안착한 것입니다. 베이스캠프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100%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며 살아가는 게 곧 수행입니다. 수행이 꼭 산중의 절이나 수도원에 들어가서 해야만 하고 또한, 거기에서만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만년설로 덮인 고봉을 견성 즉 깨달음으로 비유할 수 있지만, 우리가 계속 고봉 위에서 머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성철 스님의 법어를 통해 널리 알려진, 당송 시대 활약했던 청원유신 선사가 쓴 책인 '속전등록(續傳燈錄)'에 나온다는 구절에서처럼, 처음 깨달았을 때는 '산이 산이 아니며 물이 물이 아니다'라고 포효하게 되지만, 더 깨닫고 나면 다시 '산은 산이며 물을 물이다'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현대의 선승 숭산 스님의 '0도와 360도는 같지만 같지 않다'라는 말씀도 같은 내용입니다. 어렵사리 깨달음이라는 고봉 등정에 성공한 후, 베이스캠프를 거쳐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그가 예전과 같은 마음 자세인 것은 아닙니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분별이나 판단과 같은 무의식적인 반응이 먼저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받아들임 즉 사랑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받아들임이란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외부 세계에서 일어난 일과 사람뿐만 아니라,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 등등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입니다. 외부 세계와 내면세계 중에서도 내면세계를 먼저 받아들여야, 외부 세계에 있는 사람이나 사건·사고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게 곧 타인에 대한 사랑이 먼저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사랑이 먼저인 이유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내려놓음과 내맡김의 기쁨이 늘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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