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또는 우주의 목소리
우리는 몸을 통하여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을 뿐이죠. 마음에 담긴 두려움을 포기하는 게 바로 깨달음을 얻는 지름길입니다. 몸을 통한 수행이나 명상 등은 감각적인 착각을 불러올 뿐입니다.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없앴을 때, 우리는 비로소 신 또는 우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신 또는 우주의 목소리는 마치 라디오나 TV 전파처럼 허공 중에 늘 흐르고 있지만, 우리는 두려움을 바탕으로 하는 마음속 이성 理性이라는 체로 걸러서 듣기 때문에 스스로 온전한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즉 몸속 뇌에서 행해지는 이성적 사유 때문에,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깨달음을 쉽사리 얻지 못합니다.
이성이라는 체와 그것의 바탕 에너지인 마음속 두려움을 없애는 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일까요? 서두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포기를 하는 것입니다. 포기가 아닌 명상이나 고행 등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지 못함은, 일찍이 석가모니가 선례를 보여준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포기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여기서부터가 이 글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노력과 추구를 해왔습니다. 깨닫기 전의 고타마 싯다르타도 궁궐에서 20여 년의 세월 동안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며, 출가 후 명상과 고행을 통한 수행을 배워 실천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혹독한 수행을 통해 높은 경지의 선정(한마음으로 사물을 생각하여 마음이 하나의 경지에 정지하여 흐트러짐이 없음)에 들었음에도, 스스로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더는 가르칠 게 없으니 같이 승단을 이끌자는 스승의 권유가 있었음에도, 그는 이를 뿌리치고 이른바 속세로 나와 절망감에 정신을 잃은 채 길거리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몰라도 마침 길을 지나가던 사람으로부터 우유 죽을 얻어먹고 다시 살아난 싯다르타는, 큰 나무 아래 자리 잡고 앉아 명상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다만 제대로 먹지도 않고 고행하던 예전과는 달리, '수자타'라는 사람으로부터 우유 죽을 계속 얻어먹으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모습에 실망해서 도반이었던 다섯 비구들은 싯다르타의 곁을 떠나고 맙니다.
그러나 이러한 싯다르타의 모습에,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행간처럼 담겨 있습니다. 이제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거기에다가 절망감조차 거부하지 않았던 것이죠. 아버지인 국왕의 만류와 아내와 자식까지 남겨둔 채 출가하여 깨닫고자 하였으나, 두 명의 스승으로부터 더는 가르칠 게 없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스스로 깨달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으니 그의 절망감이 어떠했겠습니까?
기진맥진한 몸과 마음의 절망감 때문에 길바닥에 쓰러졌다가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났을 때, 그는 다시금 희망을 붙잡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왜 나를 살려냈느냐고 소리치며 절망을 붙잡지도 않았습니다. 희망도 절망도 모두 내려놓은 상태인 중도에 머무른 것이죠.
이름을 중도라고 하든 아니든 관계없이 희망과 절망 모두를 내려놓은 상태에서, 어느 날 새벽 그는 샛별을 보는 순간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비밀 아닌 비밀입니다. 희망도 절망도 모두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희망이 안 보일 때에는 절망이라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일찍이 철학자 키엘케고르가 설파한 대로, 끝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고 마는 것이죠.
그러나 싯다르타는 희망도 절망도 모두 포기하였기에 즉 전부를 내려놓았기에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석가모니가 된 것입니다. 스스로 돌이켜본다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희망 아니면 절망을 붙들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절망감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 애쓰지 않았던가요?
그도 아니라면 절망감 속에서 자포자기하며,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던가요? 물론 어릴 때의 꿈을 끝내 성취하는 분들도 몇몇은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다른 사람과의 비교우위에 서고자 하는 정도일 뿐, 별다른 꿈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게 우리의 흔한 모습입니다.
희망과 절망이 우리 인간 삶의 전부였습니다. 희망 아니면 절망인 삶을 살아왔음이죠. 그런데 제3의 길이 있음을 나는 이제부터 설파하고자 합니다. 희망도 절망도 모두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희망을 전부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런 희망이 없을 때가 바로 절망조차 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고자 한다면, 저마다 지금처럼 나름대로 애를 쓰고 추구를 해야 합니다. 그 결과 아무런 희망도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렀을 때, 부디 절망에도 빠지지 말고 다시금 희망을 붙잡으려고 발버둥 치지도 마세요.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를 그대가 깨닫고자 소망한다면 말입니다.
고로 이 글은 꿈을 갖고 무언가를 추구하다가 절망에 빠진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이런저런 풍파를 겪고 나서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가 궁금해지는, 중년 이후의 삶에 도움이 되고자 쓰는 글입니다. 성장하는 때가 아닌, 익어가는 때에 있는 도반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글입니다.
우리는 몸을 통하여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을 뿐이죠. 마음에 담긴 두려움을 포기하는 게 바로 깨달음을 얻는 지름길입니다. 몸을 통한 수행이나 명상 등은 감각적인 착각을 불러올 뿐입니다.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없앴을 때, 우리는 비로소 신 또는 우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