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실체가 없는 게 곧 실체다

신타나몽해 2022. 1. 3. 10:05
실체가 없는 게 곧 실체다


석가모니 생존 당시의 브라만교 교리처럼 아트만이 존재한다는 건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없을 수는 없다. 브라만교에서 주장하는 아트만이 없다는 게 석가모니가 설파한 무아 無我 즉 '아나트만'일 뿐, 내가 없다는 가르침은 아니지 않은가.

그가 열반 직전에 남겼다는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自燈明 法燈明 自歸依 法歸依)'에서 '자등명'과 '자귀의'가 뜻하는 바를 깊이 숙고해 볼 일이다. '나'라는 존재가 항상하지 않을 뿐, 나 자신이 없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란 무엇일까? 다름 아닌 실체가 없는 실체이며, 실체가 없는 그게 바로 '나'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실체가 없는 게 곧 나이며, 나란 실체가 없음이다. 내가 어떠한 실체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오히려 한계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으며 또한 아무것도 아니기에 오히려 내가 모든 것일 수 있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임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오랫동안 자신의 몸뚱이를 비롯하여 유형의 물질세계에 갇혀 살아온 때문일 것이다. 하다못해 무형의 관념인 생각·감정·의지 등등 정신적인 대상도 육체와 연결된 유형적인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정신적인 관념조차 나한테 나타나는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 내가 무언가 유형적이라거나 또는 무형의 관념이라면 나한테 무형의 관념이 나타날 수 있겠는가? 내가 무형의 관념이 아닌, 아무것도 없는 무 無이기에 무형의 관념이 나타나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아무런 실체가 아니어야만 내 안에 실체가 나타날 수 있음이다. 따라서 '나'라는 실체가 없음이 바로 '나'라는 실체다. 아무것도 없음이 바로 '나'인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기에 내 안에 모든 것이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천천히 숙고해보자. 실체가 없는 게 바로 실체일 수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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