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인간인 우리는 기억 자체다

신타나몽해 2022. 1. 4. 08:09
인간인 우리는 기억 자체다


우리는 기억 속에 있는 모습이거나 기억된 내용이 아니라 기억 자체다. 즉 기억이라는 능력 또는 에너지가 우리 자신인 것이다. 기억에서부터 모든 작용이 시작된다. 감각·생각·감정·느낌·의지·영감 등 모든 게 기억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의 경험 즉 기억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나 능력을 자기 자신으로 여긴다

그러나 기억된 내용이 우리 자신일 수는 없다. 치매란 어떤 일이 일어난 직후부터 일정 기간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상실이다. 이렇듯 치매 환자는 기억 내용에 대한 일시적인 장애 상태일 뿐 기억 능력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치매 환자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기억된 내용이 아니라 기억 능력 자체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상我相도 기억된 자신의 모습 또는 능력을 뜻하는 것인데, 우리는 기억된 모습이나 능력이 아니라 기억 자체이기에 이를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즉 간단없이 일어나는 기억의 내용이 아니라, 기억 능력 자체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눈이 눈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기억 자체를 기억할 수 없다.

일단 기억이 되어야 그것을 대상으로 놓고 생각하고 인식할 수 있는데 반하여, 기억 자체는 기억이 안 되므로 생각 또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 자신을 대상으로 놓고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지구상에 많은 이성주의자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인식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이를 인식 대상으로 삼으려 할 때, 우리에게는 상기증이 생기기도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 자신인 기억 자체는 기억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성에 의한 논리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다만 느낌에 의한 인식 즉 직관으로 인식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일부 선각자들은 생각을 끊으라고 얘기하지만, 생각이란 내 뜻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생각을 쉬거나 그칠 게 아니라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불안 속의 생각과 생각 속의 불안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불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불안으로 인하여 생각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불안조차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더는 불안하지 않게 되며, 이때 문득 자신이 무엇인지가 느껴지는 시절 인연이 다가온다. 내가 끌어당겨서 오는 게 아니라 저절로 다가온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추구와 애씀이 필요하다. 추구와 애씀 끝에 절망이라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석가모니가 6년간의 고행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길바닥에 쓰러졌다. 때마침 지나가는 사람의 자비심으로 우유 죽을 얻어먹고 기운을 차린 석가모니는, 이내 절망조차 버린 채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그 뒤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이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의 명상 때문이 아니라, 그가 희망과 절망 모두를 버린 때문이다. 깨닫게 된 이후 석가모니는 중도를 설파하는데, 중도란 희망과 절망 모두를 여읜 상태를 말한다. 달리 말하면 희망이란 삶이며 절망이란 죽음인데, 삶과 죽음 모두를 내려놓은 상태가 바로 중도이다.

중도란 어느 한 편에 치우쳐 기대는 게 아니라, 모두를 내려놓고 홀로 서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얘기했다. 희망도 절망도 모두 내려놓았을 때 우리는, 절망의 반대편에 있는 희망이 아니라 충만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흔들리지 않는 희망이 느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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