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사람이란 외면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는 게 아니라, 내면적으로 어린아이가 되기 시작한다. 내면이 변함에 따라 외면도 점차 따라서 변하겠지만, 우선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는 말이다.
어쩌면 내면에서조차 어린아이가 되는 게 아니라, 성인의 인식과 아이의 인식이 병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성장하면서 기억에서 지워버린 어린아이 때의 인식이 되살아나, 성인이 된 지금의 인식과 병렬로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깨닫게 되면 때로는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기도 한다.
다만 어릴 때와는 달리 논리가 정연하다. 근대의 선승이라 일컫는 경허 선사의 기행 중에, 제사도 지내기 전에 제사상에 올려진 음식을 거두어 배고픈 동네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도, 분기가 하늘까지 치솟았던 제주 즉 망자의 아들을 이해시켰던 일화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어린아이 때의 인식이 다 탁월한 것만은 아니다. 먼 길을 걸어 탁발 나갔다가 탁발한 쌀을 지고 절로 돌아오는 길에, 젊은 제자가 다리가 아프니 쉬어 가지는 말에 장난기가 발동한 경허는, 마침 물동이를 지고 가는 동네 처녀에게 다가가서는 처녀를 끌어안아 버렸다. 요즘 말로 하면 성추행을 한 것이다.
처녀가 놀라 비명을 지르고 물동이가 땅바닥에 떨어져 깨지자 경허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으며, 이를 지켜보던 젊은 제자도 어물쩍하다가는 동네 사람들한테 맞아 죽게 생겼으므로 자기도 죽을 둥 살 둥 도망을 쳐 위기를 모면했다.
우리나라 불교 조계종에서는 이게 바로 제자에게 일체유심조의 도리를 깨우치려는 경허의 행동이었다고 자랑스레 떠벌이지만, 이는 자랑스러운 사례가 아니며 경허의 어린아이 의식에 의한 치기 어린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일체유심조에 꽂힌 경허의 어린아이 의식일 뿐이다.
성인 成人이라면 자기 행동 뒤에 따르는 결과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제자에게 일체유심조의 도리를 생생하게 깨우쳐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당시 유교 윤리가 깊이 배어있던 처자가 받을 정신적 충격이며, 당장 깨진 물동이 때문에 집에서 물 마시는 것도 어려웠을 사정을 생각하여 자기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것은 경허가 제대로 깨달은 게 아니라는 방증이다.
그래서 그는 나이가 들어서 기꺼이 승려의 옷을 벗고 환속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미진함을 스스로 느끼고 이를 마저 깨우치고자 말이다. 이처럼 깨달음에 끝이란 없다. 외면에서는 죽음이라는 끝이 있지만, 내면에서는 오직 영원한 삶이 있을 뿐이다. 내면에서 영원히 깨달아가는 것, 이게 바로 진보이자 진화이다. 우리는 누구나 내면에서 진보와 진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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