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돈오돈수와 점오점수

신타나몽해 2022. 3. 9. 11:58

돈오돈수와 점오점수


스님이나 불교인들한테서 더러 듣는 말 중에 하심 下心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깨달은 사람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이를 등산에 비유한다면, 정상에 오르지 못한 사람에게 하산하라고 얘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하심하라는 충고를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은 일반 대중이 아닌 견성 즉 깨달음의 문에 들어선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견성이란 히말라야 고봉 등정에 비유할 수 있는 바, 고봉 등정이 어렵기는 하지만 하산 과정도 이에 못지않게 위험하다. 견성 상태인 기쁨의 고봉에 머물러 지내는 게 아니라,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이때 필요한 게 바로 하심 또는 점수이다. 불교에서는 보림이라는 용어로 이를 나타내는데, 용어와 관계없이 우리는 정상에서 일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깨달음의 기쁨에 취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견성에서부터 하심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데 보림 즉 하심의 끝이란 없다. 깨달음의 깊이에 끝이 없기 때문이다. 돈오돈수를 외치며 다 깨달았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깨달음의 중간 어디쯤 머물러 있음이다. 강물이 바다를 향해 흘러가다가, 커다란 호수가 바다인 줄로 착각하고 멈추어 서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고로 깨달음에 있어서는 돈오 頓悟가 아니라 점오 漸悟이며, 돈수 頓修가 아니라 점수 漸修라는 게 나의 지론이다.

깨달음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고타마 싯다르타도, 출가하기 전 많은 깨달음이 있었기에 국왕인 아버지 등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가하는 용기를 낼 수 있었으며, 출가하여 사문이 된 뒤에도 6년간의 고행을 통한 깨달음이 있었기에 길바닥에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가 극적으로 다시 살아난 다음, 마지막으로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돈오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돈수라는 건 하심에 한계가 있다는 말인데 우리는 끝없이 하심 즉 점수를 해야 하는 존재이다. 이유는 없다.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다. 우주에 한계가 없는데 어찌 깨달음에 한계가 있고 하심에 한계가 있겠는가? 점수가 아니라 돈수가 맞다는 주장은, 깨닫고 나면 마음의 바다에 출렁임이 멈춘다는 주장과 같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면 가장 큰 추구심이 사라지는 것일 뿐, 그렇다고 다른 작은 일에 대한 추구심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쓰나미처럼 큰 파도가 지나갔다고 해서 작은 파도마저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견성이라는 가장 높은 봉우리는 등정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하심이라는 바다는 누구도 쉽게 정복할 수 없는 깊이를 가졌기에,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하심하고 점수해야 한다. 그래서 돈오돈수가 아니라 점오점수라고 나는 감히 단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