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무아 無我

신타나 2025. 10. 14. 18:04

무아 無我


몸으로 살아있으면서 나를 죽여 없애는 게 바로 '무아'다. 그것도 물리적으로 죽여 없애는 게 아니라, 심리적으로 즉 마음 안에서 마음을 죽여 없애는 것이기에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마음 안에서 마음을 죽여 없앤다는 것. 마치 강 위에 놓인 다리 위에서 다리를 철거하는 격이리라. 길은 하나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발을 딛고 서 있는 다리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비록 겁이 나지만, 전체의 완벽한 사랑을 믿고 지금 닫고 있는 다리 상판을 하나씩 걷어내는 것이다.

불안한 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불안이 점차 평안으로 바뀌게 된다. 불안한 마음을 없애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려고 애써야 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마음이라는 다리 상판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마음을 없애려고 하는 순간 우리 마음은 더욱 불안해질 뿐이다. 고로 불안을 없애는 게 아니라 불안조차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나 죽었소." 하고 전체에게 그저 납작 엎드리는 것이다. 전체를 신이라 이름하든 아니면 다른 무엇으로 이름하든 말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무슨 합리적 근거가 있어서 믿는 게 아니라,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나라는 개인이 아닌 전체의 힘을 믿어보는 것이다.

또한 나라는 개인적인 주체는 허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또는 개체적으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깨달음의 대상이다. 깨닫고 보면 몸과 마음으로 표상되는 나란 존재하지 않는 허상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한번 반복 설명하지만, 몸 자체가 허상인 게 아니라, 몸을 나라고 믿는 그 관념이 허상인 것이다. 깨달은 선각자들도 일부 잘못된 주장을 하는데, 우리 몸과 그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적이며 물리적인 대상이 허상인 게 아니라, 육체를 자신으로 믿는 생각이 허상일 뿐이다. 우리의 몸뚱이도 저 앞에 있는 산도 집도 모두가 실존하는 실상이다. 모든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대상이 허상인 게 아니다. 다만 자기 몸을 자신으로 착각하는 생각 또는 관념이 허상일 뿐이다. 이점 착오 없기를 바랄 뿐이다. 많은 깨달은 선각자들도 착각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재삼 강조하는 것이다.

아무튼 물리적인 몸 자체가 허상인 게 아니라, 마음과 함께하는 몸과 그리고 몸과 함께하는 마음을 나라고 여기는 게 곧 착각이요 허상이다. 또한 몸과 함께 따로 분리 독립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내가 바로 개인적인 나이며, 이러한 개인적인 나를 스스로 없애는 게 바로 무아이다. 무아를 체득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려운 만큼 무아를 체득한 결과는 참으로 자유롭고 평안하다. 이게 바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지극한 복락 즉 지복인 것이다. 몸과 함께 태어난 우리가, 몸 안에서 몸을 스스로 없애는 엄청난 일을 행하는 게 바로 무아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건 정신적 믿음도 아니며 육체적 행동도 아닌, 마음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를 백척간두진일보 百尺竿頭進一步라고 표현한다. 다른 표현으로 동양에서는 절벽에 매달린 나뭇가지를 잡은 두손을 놓으라고 하며, 서양에서는 절벽 가까이 온 제자의 등을 스승이 떠밀었더니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날개가 돋고 날게 되더라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신체적인 행동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두려움을 내려놓으라는 하나의 비유일 뿐이다. 마음속에 있는 정신적인 두려움을 내려놓는 게 바로 개인적인 자신을 죽여 없애는 무아인 것이다. 부디 무아를 깨달아 우리가 몸으로 살아서 자유와 평안을 느껴볼 일이다. / 김신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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