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정반합 正反合

신타나 2025. 12. 24. 08:33

정반합 正反合


정이 에고적인 나(개아 個我)라면, 반은 아가페적 사랑인 영혼이다. 거기에서 이루어진 합이 바로 이데아 Idea 즉 신의 이상 理想인 것이다. 그리고 신의 이상인 이데아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영원히 반복된다. 정과 반이 하나가 된 합이 새로운 정이 되고, 여기에서 또다시 반이 창조되며 이로써 또 합이 도출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물질이 진화하고 역사가 진보하는 것이다.

이처럼 진화와 진보는 삼각형을 그리면서 우상향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반이라는 건 나쁜 게 아니라, 언제나 정과 함께하는 동반자 내지 반려자이다. 때로는 선생이거나 스승일 수도 있음이다. 선이 정이라면 악은 반이며, 정의가 정이라면 불의는 악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악에 물들어 있다면, 선을 악하다고 할 것이며 정의를 불의라고 하지 않겠는가? 고로 선과 악 그리고 정의와 불의란,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게 아닌 상대적 주관일 뿐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우리는 항상 정의를 내세우며 싸워 왔지만, 이기는 쪽이 정의라거나 힘이 정의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정반합의 진리는 멈추지 않고 적용된다. 힘센 자가 정의일지라도 거기에 대한 반대 세력은 또다시 나타났으며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로마제국이 그러했으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했던 대영제국이 그러했다. 시대와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정반합 원리는 흔들림 없는 진리라고 할 것이다.

얘기가 잠깐 빗나갔는데 여기서 우리는 국가 또는 종교 단체와 같은 조직이 아니라, 개인에 있어서 정반합의 원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자신 안에 두 개의 자아가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에서처럼 말이다. 그게 바로 서두에서 언급한 에고적인 나와 아가페적인 사랑의 영혼이다. 다만 개인적이며 개성적인 나는 현실적 존재인 반면, 영혼이란 개인적이거나 개성적이지 않은 이상적 존재이다. 또한 개인적인 나는 오감의 지각 대상이나 이상적 존재인 영혼은 오감의 지각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 모두가 가짜라면 어떨까? 가짜라고 해서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일 뿐이다. 진짜 사람이 아닌 가짜인 인형이 나쁜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현실적인 나와 이상적인 영혼 모두가 가짜라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해답은 우리가 진짜 나를 찾아가는 것이다. 늘 함께하는 몸으로서의 내가 진짜가 아니라는 점은, 불교에서도 늘 강조하는 바이다. 무아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이제는 우리 모두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들어서야 할 때이다.

진짜 나라는 것은 오감의 대상인 몸을 주체로 하는 현실적 나도 아닐뿐더러, 오감의 대상이 아닌 이상적이며 아가페적 사랑인 영혼도 아니다. 이 둘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고자 존재하는 아바타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아바타와 보이지 않는 아바타인 것이다. 한마디로 임시적으로 존재하는 무상한 존재일 뿐이다. 연극배우가 해당 연극에서 맡은 배역이 실재 인물이 아니라, 연극 대본에 있는 가상 인물인 것처럼 말이다.

그럼 실재 인물인 진짜 나는 무엇일까? 이게 바로 구도의 과정이요 깨달음이다. 나라는 것은 영혼과 마찬가지로 오감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알 수 없음이다. 왜 알 수 없음일까? 우리가 지금 이 글을 읽거나 또는 쓰는 게 바로 실재하는 나임에도, 우리는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답답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감의 대상인 (몸으로 대표되는) 내가 지금 글을 읽거나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이는 몸을 통해서 글을 읽고 쓰는 것일 뿐, 보이는 몸이 글을 읽고 쓰는 건 아니다. 이는 현미경이나 망원경이 물체를 보는 게 아닌, 사람이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보이는 우리 몸을 현미경이나 망원경으로 비유한다면, 보이지 않는 진짜 나는 그 현미경이나 망원경을 통해 보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눈으로 보이지 않고 오감으로 지각되지 않기에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나라는 것은 대상이 아닌 주체라는 점을 깊이 사유해 보면 그래도 쉽게 이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대상은 오감의 영역 안에 있는 반면 주체란 오감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 주체란 대상처럼 감각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체가 없을 수는 없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말하는 게 바로 주체인 내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란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사유)하다 보면, 주체인 나와 대상인 몸이 분리되어 보이는 때가 조만간 올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주체인 나와 대상인 몸을 뭉뚱그려, 하나의 주체로 보아 왔지만 말이다. 여기가 바로 깨달음의 시작점이다. 주체와 대상을 분리해서 볼 수 있는 시야를 갖는 때를 말한다. 주체가 무엇인지 대상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고자 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깨달음이란 단박에 깨닫는다는 돈오가 아니라, 정반합 원리에 의해 점진적으로 깨달아가는 점오인 것이다. 물론 이 모두가 통합되는 마지막 걸음에서는, 지나온 모든 자리가 한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우리가 이를 돈오라고 이름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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