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깨달음에 대하여

신타나몽해 2020. 4. 22. 05:51
깨달음(견성)은 그에 대한 어떠한 개념도 우리가 사전에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어떤 개념이든지 우리가 미리 갖고 있다면 깨달음은 결코 우리 내면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니 들어오지 못합니다.

깨달음이란 우리 내면의식으로 들어온 다음에야 비로소 인식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미리 개념을 만들어 갖고 있다면, 그것은 입구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과 견주어 보고는 들어오지 못하고 늘 거기에서 서성입니다.

우리 내면으로 들어오고 싶어도 우리가 이미 모양을 정해놓았고, 그는 우리가 정해놓은 모양과 다르므로 들어오지 못하고 언제나 밖에서 서성거릴 뿐입니다.

그리고 생각이란 우리가 멈추거나 끊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눈이 보고 귀가 듣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이란 의식이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의식에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각을 멈추거나 끊는 게 아니라 깨달음에 대한 어떠한 개념을 우리가 미리 갖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불안도 갖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그저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라는 식으로 우리가 마음을 낼 때, 그때 깨달음은 우리 내면 의식으로 들어와 우리에게 어떠한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게 바로 깨달음의 시작인 견성이며 그중에서도 초견성입니다. 여기서부터 이미 깨달은 사람들이 쓴 책을 읽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직접 찾아가 가르침을 듣는 등 공부가 진짜 시작됩니다. 그리고 깨달은 다음에 행하는 공부는 외부에서 지식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깨달음의 단초를 외부에서 얻기 위함입니다.

공부하는 중에 내면에서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외부로부터의 공부를 잠시 중단하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먼저 숙고해야 합니다. 외부에서의 공부는 공부 내용인 지식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단초를 얻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마치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의 실마리를 잡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외부에서의 공부는 실마리를 잡는 것이고, 깨달음 즉 견성이란 내면에서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가 하나하나 저절로 술술 풀려나가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얽힌 의문 즉 화두의 실타래를 푸는 과정에 있어서, 내가 애써 푸는 게 아니며 또한, 생각의 속도를 내가 정해서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생각이 일어나고 흐르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견성을 한 뒤에는 생각이 흘러가는 속도를 따라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렇게 생각이 일어나는 속도를 앞질러가지 않고 나란히 가는 것이지, 생각을 멈춘다거나 또는 생각을 끊는 게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더 얘기하지만 생각이란 내가 의식적으로 먼저 일으키거나 또는, 멈추거나 끊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저절로 일어난 생각을 내면에 담을 수 있는 즉 우리 스스로 의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또는 나는, 일어나는 생각을 담을 수 있는 즉 의식할 수 있는 바탕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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