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고요히 있으라, 그리고 내가 신임을 알라 2

신타나 2024. 9. 9. 01:46

고요히 있으라, 그리고 내가 신임을 알라 2


나는(우리는) 물질세계에 있지 않은 신 神이다. 즉 물질세계에는 내가 없다. 그래서 무아 無我인 것이다. 깨달은 분들은 일찍이 무아와 공 空을 말씀했으며, 진공묘유 眞空妙有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여기서 공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공간 개념에서의 텅 빈 허공이 아니라, 시간이나 공간에 대한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의 텅 빔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나'라는 존재는 감각의 세계인 물질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물질계를 벗어난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텅 빈 미지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미지의 세계에 나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이자 전체이며 또한 절대인 존재와 함께 존재한다. 전체이기에 하나이며 절대이기도 한 존재를 우리는 보통 신 神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따로따로 각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전체인 신 안에서 '하나로' 함께 존재함이다. 고로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한다. 제목에 적혀 있는 것처럼 누구나 내가 바로 신이지만, 신 안에서 신일 뿐이며 신으로부터 신의 능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자신이 신임을 깨달아 아는 일이다. 자신이 신임을 깨달아 알아야 신이 되는 것이지, 우리 모두가 저마다 신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해서 신이 되는 건 아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믿기지 않는 얘기가, 자신에게 진실이거나 진리로 체득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깨달음이 필요한데,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함을 먼저 밝혀둔다.

첫째로 "깨달음은 자신의 노력이나 힘만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자신 안에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행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음 두 번째로는 "깨달음은 자신의 애씀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주어지는 신의 은총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얼핏 보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얘기가 결국은 같은 얘기를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이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은 스스로 꾸준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아무리 해도 깨달음이 얻어지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석가모니의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면 이렇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29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부모와 처자식마저 내팽개치고, 거기에다가 일국의 왕이 될 수 있는 왕자라는 자리마저 아무런 미련 없이 버리고 출가를 결행했다. 이후 6년간 스승을 모시고 치열한 수행과 고행을 거듭했음에도 그는 결국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는 도반들과 함께 스승을 떠나 길을 걷다가, 부모와 처자식과 왕자의 자리마저도 기꺼이 버리고 출가하여 스승의 가르침 아래 6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처절하게 수행했음에도 결국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절망감에, 그는 도반과 함께 걷던 길 위에서 기절하여 길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이튿날 새벽 우연찮게 같은 길을 지나던 사람의 눈에 띄어 우유죽을 얻어먹고는 다시 기운을 차리게 된다. 이후 그는 날마다 우유죽을 얻어먹으며 커다란 나무 아래서 명상을 하다가 어느 날 새벽 문득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때 그는 깨달음을 얻겠다는 의식적인 추구심을 버리고 명상에 들었던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겠다는 생각 즉 추구심은 포기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깨달음을 얻는 것 자체를 포기했다면 큰 나무 아래 앉아 굳이 명상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겠다는 생각 내지 소망을 포기한 것일 뿐, 깨달음에 대한 생각조차 마음속에서 지워버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여전히 깨달음에 대한 생각을 간직하고 있던 그에게 어느 날 문득 깨달음이 다가왔으며, 예전에 스승으로부터 자신이 깨달았다는 얘기를 들었던 때와는 달리, 석가 자신도 스스로 깨달았다는 사실이 느껴지고 인정되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깨달음을 얻겠다는 생각이 내려놓아진 것일 뿐, 깨달음에 대한 생각조차 내려놓아진 것은 아니었다. "나란 무엇일까?" "깨달음이란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여전히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그에게는 다만 자신의 노력이나 힘으로 깨달음을 얻어보겠다는 그 마음이 내려놓아진 것이다. 자신의 노력이나 힘으로 깨달음을 얻겠다는 그 마음이 내려놓아지기까지 무려 3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음이다. 35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건 아니지만 보통의 우리에 비한다면 매우 짧은 시간이다. 60살이 넘어서도 때로는 죽을 때까지도, 1단계인 자신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나란 무엇일까?" "깨달음이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바로 화두이고, 이러한 화두를 붙들고 명상 수행하는 게 바로 우리나라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인 간화선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화선의 문제점이 발견된다. 처음부터 화두를 붙들고 앉아서 명상하는 참선에는, 자신의 노력이나 힘만으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음을 체득하는 과정인 첫 번째 단계가 빠져있다. 첫 번째 과정인 "깨달음은 자신의 노력이나 힘만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득하지 못하고 백날 화두 참선을 해보았자 도로아미타불이다. 자신의 애씀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체득하고 난 뒤, 두 번째 단계인 화두 참선에 들어야 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두 번째 단계인 화두 참선을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힘으로 깨닫고자 애쓰게 되니까 상기 증상이 일어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아무리 노력하고 힘을 써봐야 깨달음이란 결국 먼 나라 남의 얘기가 되고 만다. 이율배반적인 내용 같지만 "자신의 애씀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주어지는'' 신의 은총과 같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꾸준하고 반복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비교적 단기간의 치열한 수행이든 장기간의 지속적인 관심이든 아무튼 열정이 있어야만, 결국에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원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치열하거나 또는 꾸준한 애씀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결과에 실망한 사람만이, 더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신이나 우주 또는 절대 앞에 겸손할 수 있고 복종할 수 있음이다. 이게 바로 내려놓음이고 내맡김이다. 이때가 2단계 과정이 시작될 수 있는 출발점이다. 출발점이지만 출발할 수도 있고 거기 그대로 머물 수도 있음이다. 그리고 꼭 화두 참선이 아니라 해도, 일상생활 속에서 의문을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의문 또는 화두를 가질 때 우리는 누구나 그에 대한 해답을 들을 수 있다. 어느 날 문득 저절로 들려오는 해답, 이게 바로 깨달음이다.

의문 또는 화두에 대한 해답 즉 깨달음이란 자기가 스스로 찾아내는 게 아니라,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다. 의문에 대한 해답인 깨달음이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나는 이를 신의 은총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이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바로 1단계 과정이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1단계 과정과 2단계 과정이 혼합된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는 헛수고를 하게 된다.

1단계 과정인 치열한 애씀 또는 오랜 시간의 관심을 통해서도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내려놓게 된 다음, 2단계 과정인 내맡김을 통해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되는 게 바로 깨달음의 과정이다. 깨달음이란 우리가 자신의 힘이나 노력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다음으로는 절망에 빠져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한다. 자기 자신이 힘을 쓰는 게 아니라, 힘을 빼고 다만 의문에 대한 해답을 기다리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일찍이 고타마 싯다르타가 절망감 속에서 길바닥에 쓰러졌다가 이튿날 깨어난 뒤부터 보여준 일련의 행동에서처럼, 자기 자신 즉 내가 깨달음을 얻겠다는 생각이 아닌, 다만 "나란 무엇인가?" 또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화두)을 가진 채 겸손하게 해답을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내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게 아닌, 즉 무아 無我의 상태에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자신이 가진 의문에 대한 해답을 기다리는 마음 자세가 곧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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