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詩 324

꽃의 향기

꽃의 향기 신타 잘 씻지 않는 사타구니 냄새가 바로 꽃의 향기였다니 오월 어느 날 코를 박고 한참을 숨 들이쉬던 곳이 장미 부인의 그곳이었다니 유월을 유혹하던 밤꽃향이 밤송이처럼 머리를 깎은 사내들의 정액이었다니 그러고 보니 그렇다 그곳에서 자녀가 잉태되듯 꽃들도 그곳에서 열매 맺는다 다만 꽃들은 낮에 사랑을 속삭이고 우리들은 어두운 밤을 사랑한다 부끄러울 것 하나 없이 암수 모두 태양 앞에서 생식기를 드러내놓는다 잎으로 가릴 것 없이 손으로 감출 것도 없이 무엇 하나 숨기는 것 없이

신작 詩 2020.11.25

사랑한 후에

사랑한 후에 신타 시 쓰는 사람은 시로써 아픔을 노래하고 노래 부르는 사람은 노래로써 상처를 다독인다 어머니가 세상 떠난 그날을 생각하며 만들었다는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오늘 밤엔 수많은 별이, 기억들이 내 앞에 다시 춤을 추는데 종소리는 맑게 퍼지고 저 불빛은 누굴 위한 걸까 새벽이 내 앞에 다시 설레이는데」 누군가를 사랑한 후에 누군가와 이별한 후에 우리에겐 슬픔이 밀려온다 그러나 그조차 아름다운 들물이다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분노이거나 축복이거나 우리에게 다가온 감정은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게 없다 모두가 사랑이기에 내게 아픔을 주고 간 사람도 상처를 남기고 떠난 사람도 그가 아니라면 언제 우리가 사랑에 아파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아니라면 언제 우리가 사랑의..

신작 詩 2020.11.24

창가에서

창가에서 신타 「까닭없이 눈물나는 날 나는 바다로 간다 파도에 얼굴을 묻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울음을 운다 울음을... 」 바다가 없는 생맥주 집 나는 투명하게 파도치는 창가에 자릴 잡는다 도시의 한복판에 이렇듯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고통과 기쁨 속에 살다간 고흐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너는 라일락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라일락을 사랑한다 너는 밤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밤을 사랑한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노래 옆에 수년 전 내가 써놓은 글을 보다가 창밖 파도에 얼굴을 묻고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울음을 운다 이 아침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며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 싶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지고 상심한 별이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 가슴에 남은 희미..

신작 詩 2020.11.18

너 자신을 사랑하라

너 자신을 사랑하라 신타 나는 그를 사랑하는데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건 매우 힘겨운 삶임에 틀림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 마음을 알리지도 못할 때 그건 더욱 힘겨운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녕 힘겨운 삶은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왜 힘든지도 모르는 채 고난의 연속일 뿐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함과 다를 바 하나도 없다 너 자신을 알라! 는 너 자신을 사랑하라! 로 바뀔 때가 이제는 된 것이다 더 풍족한 삶을 살기 위해 발달한 물질문명 속에서 우리는 지나치게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목마른 사막을 지나고 있음이다 아니면 거센 파도가 이는 고해를 항해 중이거나 너 자신을 사랑하라 다른 누구와 비교함이 없이 오직 너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라

신작 詩 2020.11.18

광한루원 추경

광한루원 추경 신타 차가운 누각을 품고 있는 들처럼 넓은 정원이기에 춘향전은 단오날이지만 가을이 제 철인 듯도 하다 정원 내 세월 켜켜이 쌓인 버드나무도 그렇거니와 담을 이루고 있는 고목들 가을을 두른 채 단풍 지다 황희 정승이 처음 세운 뒤 육백 년 긴 세월의 빛 담긴 춘향의 애절한 사연 담은 광한루원에 가을이 깊다 말없이 꼬리만 흔들흔들 헤치며 지나가는 연못 속 한 마리 대물 비단잉어는 임진왜란과 육이오까지 누원과 함께 헤쳐 나온 듯 여유로우면서 장중하다 국악의 선율 흘러나오는 햇볕 따사로운 광한루원 가을날 풍경에 젖어본다

신작 詩 2020.11.11

이혼 심판 출석통지서를 태우며

이혼 심판 출석통지서를 태우며 신타 법원 출석을 나흘 앞둔 날 그녀가 결국 눈을 감았고 화장시켰다는 문자가 왔다 하루가 더 지난 오늘 지갑 속에 고이 간직해오던 법원 출석통지서를 불에 태웠다 간암 환자인 그녀에게 간 이식을 해주기 위해, 수술 날짜를 앞당기기 위해, 수년간 애인이자 친구였으나 법적으로 남남인 그녀와 나는 맘에 없는 혼인 신고를 했다 삼 개월간의 번민을 거친 하나뿐인 그녀 아들이 나타났을 때 우린 다시 이혼 신청을 했다 무늬만 남편인 나보다 혈연인 아들이 수술 시기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러나 수술 날짜만 잡고는 그녀는 다른 길을 택했나 보다 아들의 건강도 염려되고 자신도 위험한 수술보다는 조금은 망설였겠지만 죽음이라는 빛의 길을 택했나 보다 우리는 누구나 다 그곳에 대한 기억을 상실..

신작 詩 2020.11.10

정情은 카르마다

정情은 카르마다 신타 수년 동안 정을 나누었던 연인이자 친구가 암 투병 끝에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기차역 눈물이 핑 돌았다 정은 카르마라는 말을 나는 받아들인다 오십 대 중반에 처음 만난 인연 전생에도 부부였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그녀 육신의 불꽃이 꺼지기 직전 서로의 카르마를 씻어내는 일이 있었다 카르마인 정을 끊기 위해 일어난 일임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서운할 것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영혼들의 멋진 합창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모든 게 시절 인연이다 그녀와 나 그리고 모든 사람의 모든 행동이 모두를 위해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육신은 비록 사라졌을지라도 그녀와의 기억은 내 가슴에 영원하리라 저녁노을..

신작 詩 2020.11.09

꿈 신타 아무런 기대 없이도 이렇게 기쁠 수 있음은 기대가 없기에 오히려 불안이 사라지는 때문이다 무심하게 바라보는 차창에 가을 풍경이 이어진다 낯선 곳을 향해 가고 있다 낯설지만 새로울 것 없는 새롭지만 낯설 것 없는 세월 이제는 기대 없는 허공 힘겨운 세월 살아낸 뒤란 기쁨으로 가득하다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대는 비록 내려놓았어도 꿈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은 포기하지 않는다 꿈은 언제나 이미 내 옆에 와있기 때문이다

신작 詩 2020.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