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믿음의 굴레

신타나몽해 2022. 1. 2. 08:02

믿음의 굴레


믿음이란 나를 구속하는 굴레일까? 그것은 굴레일 수도 있으며 오히려 굴레에서 벗어남일 수도 있다. 믿음이란 억압이 될 수도 있고 자유가 될 수도 있음이다. 그런데 그것이 억압인지 자유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사실 매우 간단하다. 무엇에 대한 믿음이든지 관계없이 믿음이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면 그건 자유이며, 처음엔 편안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해진다면 그건 억압이다.

믿음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새로운 굴레가 되어 인간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여러 번 보아왔다. 한때 로마 대제국을 등에 업고 유일신을 부르짖던 기독교가 그러했으며, 한때 많은 지성인을 현혹시켰던 공산주의 사상이 그러했다. 다른 종교나 다른 사상을 허용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 또는 유일사상 등은 그 자체로써 부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심지어 면죄부까지 만들어 팔았던 기독교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며, 소련도 페레스트로이카라 불리는 개혁정책이 당시 지도자인 고르바초프 대통령에 의해 단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적 믿음에 의한 광란의 역사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진행형이지만, 개별적으로는 종교적·사상적 믿음에 의해 굳건한 자기규정이 부서져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종교나 사상이란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은 아니며, 누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에 달린 일일 뿐이다.

일찍이 석가모니도 설파했지만 우리의 삶은 고해다. 그리고 고해에서 벗어나는 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믿음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더 어찌해볼 수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신이나 부처와 같은 절대자에게 매달리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괴로울 때면 별다른 이유 없이도 신이나 부처 등에 의지하고 매달릴 때,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는 경우가 때때로 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종교적 또는 신앙적 의미에서의 믿음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외부에 있을 수는 없다. 아무리 신이나 신적 존재를 믿는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내면에서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믿는다고 해도 자신의 내면에서 믿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내면을 벗어날 수 없다. 믿음도 신도, 심지어 자기 자신도 내면에 있을 뿐이다. 내면이란 다름 아닌, 우리 저마다 자신의 왕국이자 무 無의 세계다. 눈에 보이는 우주는 아니지만, 눈에 보이는 우주를 비롯한 모든 유형·무형의 세계를 망라하고 있다.

형이상학적 세계뿐만 아니라 물질 우주까지도 담고 있는, 70억 인류 각자가 왕국의 주인이다. 우리는 누구든지 자신의 왕국에서 벗어날 수 없다. 커다란 우주에서 먼지보다 작은 존재는 내가 아니라 내 몸일 뿐이다. 내 몸뚱이가 내 왕국에 존재하는 티끌보다 작은 존재일 뿐, 나는 감각적 우주는 물론이며 형이상학적 우주까지도 감싸는 시공을 초월한 존재이다.

따라서 내 우주 안에서 나 아닌 게 없다. 유형·무형의 모든 게 나의 현현이다. 내가 미워하는 대상도, 좋아하는 대상도 모두가 나 자신일 뿐이다. 고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거나 좋아하고 있음이다. 자기 자신을 깨끗하다거나 더럽다고 하고 있으며 또는 태어났다거나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내 몸이 아닌 나란, 불교 반야심경에 나오는 것처럼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이요 부증불감이다. 나지도 죽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고정된 존재는 아니며, 끊임없이 진화해나가는 존재다. 영원히 존재하며 끊임없이 진화해나가고 있음이다. 이 모든 게 나를 자유케하는 내 안의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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