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깨달았다고 해서 일상생활에서 똥인지 된장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또는 구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자신한테 닥쳐온 어떤 상황으로 인해서 자신이 행복하다거나 또는 불행하다는 등의 구분을 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물리적인 구분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구분을 하지 않음이다. 자기한테 이익이 되고 안 되고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살아온 자기 경험이나 기억 등에 따른 두뇌 작용에 의해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내면의 울림에 따라 의사를 결정한다. 지금 당장은 자신에게 불이익이 되는 것 같은 일이 있어도 내면의 울림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깨달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차이일 뿐 그 나머지는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런데 행•불행을 구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게, 그 사람의 삶에 얼마만큼 정신적 평안을 가져오는지는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보통의 우리에게는 모든 상황이 행복과 불행으로 나누어지나, 깨달은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닥치는 상황이 그저 하나의 상황으로 여겨질 뿐이다. 행복한 상황과 불행한 상황으로 구분되지 않으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냥 여여할 수 있음이다. 모든 상황이 받아들일 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닥친 상황이 자기가 원했던 대로가 아닐 경우 새로운 시도를 할 뿐이다. 또한 어떠한 상황이라도 행복하거나 불행한 상황이 아니므로, 행복하거나 불행한 내가 있을 수 없다. 자신을 일정한 정신적•관념적 범주에 넣지 않을 수 있음이 바로 깨달은 사람이 가진 능력이다. 깨달았다고 해서, 무아 無我라고 해서 '나와 남'이 없는 게 아니라,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규정지음이 없을 뿐이다. 무아를 깨달았다고 해도, 자신의 내면에서 어떠한 '한계나 범주에 들어있는 나'가 없어지는 것이지, 그러한 '한계나 범주를 벗어난 나'조차 없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나와 너'라는 구분이 없으며 일상생활에서 활동하는 것은 아바타나 캐릭터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분이 더러 있으나, 그 아바타나 캐릭터는 자기 내면에서 아바타이거나 캐릭터일 뿐이지, 내면이 아닌 외부적으로는 깨닫기 전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깨닫기 전에는 내면에서 자신과 몸 마음이 일심동체였으나, 깨달은 다음에는 내면에서 몸 마음을 자신과 분리된 아바타나 캐릭터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뿐이다. 이처럼 분리와 벗어남은 자신의 내면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물리적 현상은 아니다.
(유형의 몸과 함께하는) 마음이라는 무형의 틀에서 벗어나는 게 깨달음이며, 이는 자신의 내면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에, 물리적으로는 깨닫기 전과 마찬가지로 몸이 곧 그이고 그가 곧 몸인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물론 깨닫게 되면 내면에서는 몸 마음이 내가 아님을 분명히 알게 되지만, 외부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바타나 캐릭터가 아닌 여전히 몸 마음 그대로이며, 다만 예전에는 몸이 마음의 지시를 받았다면 깨닫고 나서는, 몸과 마음 모두 내면에 존재하는 '무형의 나'의 지시를 받는 변화가 생긴다. 무아라는 게 외부 세계에서 현실적으로 몸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몸이 곧 나라는 오랫동안 굳어진 인식이 각자의 내면에서 없어지는 것일 뿐이며, 깨달은 후에는 주인의 자리에 있던 마음이 하인의 자리로 쫒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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