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라고 말하지 말라
원효 스님이 밤중에 갈증 나던 참에 물을 시원하게 마시고 난 뒤, 이튿날 아침 밤중에 마신 물이 해골 물임을 알고는 구토가 나왔으며, 해서 일체가 마음의 작용임을 깨달았다는 게 '일체유심조'이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마음만 있었던 게 아니라, 해골에 고인 물이 있었고 그걸 마신 몸이 있었으며, 썩은 물은 몸에 좋지 않다는 지식적 앎 또한 있었다. 다만 마음이 어둠 속에서도 갈증을 덜어줄 물을 찾았고, 이튿날 아침 해골에 고인 물이었음을 알고는 구토를 일으킨 것도 마음의 작용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마음이라는 것도 해골 물을 마시는 일이 없었다면 아무런 작용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즉 모든 걸 마음이 만들어 내는 건 맞지만, 마음이라는 것도 외부적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종속변수일 뿐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다른 변수의 변화와는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변화하는 독립변수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원효 대사의 일화에서와 같이 밤중에 산중에서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동굴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목이 말라 부근에 마실 물을 찾던 중 뭔가 그릇 같은 것에 고인 물을 발견하고는 이를 시원하게 마셨으며, 이튿날 아침 그게 해골에 고인 물임을 알게 된 현실 상황 자체가 바로 독립변수가 아닐까?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 현실적 상황이 바로 독립변수이고, 마음이란 현실적 상황에 따라 변하는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일체를 만들어 내는 건 마음이 아니라, 마음 이전에 있었던 바로 현실(현실적 상황)이지 않겠는가? 따라서 진짜 중요한 것은 마음이 아닌,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과 사고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짚어내야 할 부분은, 독립변수인 현실 속의 사건과 사고는 "왜 일어나며 누가 일으키느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조차 마음의 작용으로 보고, 마음이 종속변수이자 동시에 원인인 독립변수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위 원효 대사의 해골 물 일화에서와 같이 그가 의상 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 가고자 한 것과, 길을 걸어가던 중 밤중에 폭우가 쏟아져 해골이 흩어져 있는 줄도 모르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그의 마음이 일으킨 게 아니지 않은가? 해골이 흩어져 있는 동굴인 줄 알았다면 그의 마음이 그곳으로 향했겠는가? 원효 대사의 마음이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은 아니라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쯤에서 결론을 맺고자 한다. 신라 시대 원효 대사로부터 시작된 '일체유심조'는 더 이상 맞지 않는 얘기다. 마음 이전에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현실적 상황이 있으며, 현실적 상황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에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어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종속변수인 마음의 움직임이 아니라, 독립변수인 현실에서의 사건과 사고가 왜 일어나는가에 있다고 하겠다. 이제부터는 종속변수에 불과한, 마음에 의해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일체유심조'가 진리인 것처럼 말하지 말자.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 삶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과 사고는, 어떻게 해서 그리고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일체유심조'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토록 오랫동안 원효 대사의 '일체유심조'라는 깨달음의 말씀에 열광했다. 그러나 이제는 보다 근원적인 탐구를 해보자. 마음 이전의 동인 動因 즉 독립변수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자. 그게 바로 대다수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뜻이다. 우리 저마다의 내면에서 각자마다 다르게 작용하는 신의 뜻이 바로 독립변수인 것이다.
신의 뜻이란 과거 원시시대 주술사에게만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유대민족의 지도자인 '모세'에게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며, 중세 로마 시대 이후 기독교라는 세계적인 종교의 성직자에게만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인류 모두의 내면에 신이 있으며, 그 내면의 신에 의해서 저마다 마음에서 의지가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당신이 이 글을 읽는 것도 모두가 신의 이끌림에 의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건 독립변수인 주인이 아니라, 종속변수인 종이나 하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인은 다름 아닌 신이자 우리의 참자아 (또는 참나)인 것이다.
신이기도 한 우리 저마다의 참나가 바로 마음을 부리는 주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마음이 주인이 아니며 일체유심조 또한 진리가 아닌 것이다. 마음이란 현실이라는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종속변수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주인은 겉으로 보이는 몸과 (그리고 마음과) 함께하는 의식체가 아니며, 보이지 않는 내면에 있는 순수 의식체이다. 여기서 '순수'라는 말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형상화할 수 없는, 즉 이미지화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상태가 바로 순수인 것이다.
저마다의 내면에 있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순수 의식체인 신 또는 참나가 일체를 창조하고 있음이다. 우리 마음의 평화와 고통, 이 모두가 다름 아닌 신 (또는 참나)에 의해서 빚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마음이란 주인이 아닌 종에 불과하며, 독립변수가 아닌 종속변수일 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저마다의 내면에 신적 존재인 참나가 있음을 하루빨리 깨달아 아는 것이며, 마음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어 마음을 하인처럼 부리는 것이다. 그 결과로 어떠한 고통도 고통이 아님을 깨달아, 강 같은 평화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일체유심조가 아닌, 마음을 하인처럼 부릴 수 있는 세상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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