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195

도 道란 무엇일까?

도 道란 무엇일까? 분별에서 벗어나는 것 또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게 '도'가 아니라, 감각에서 벗어나는 게 바로 도입니다. 우리가 오감 즉 감각에서 벗어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감각에서 벗어난다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감각에서 벗어나는 단적인 예가 바로, 멀쩡히 서 있는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처음으로 지동설을 주장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의한 재판과 심지어 이탈리아의 '조르다노 부르노'라는 카톨릭 수사이자 철학자는 발가벗겨져 화형까지 당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감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감 중에서 대표적인 감각은 다름 아닌 시각일 텐데요, 시각적 오류는 앞에서 예를 든 지동설에서처럼, 지구가 도는 게 ..

깨달음의 서 2024.09.03

내가 없는 것이지 세상이 없는 게 아니다

내가 없는 것이지 세상이 없는 게 아니다 이 세상이 가짜인 게 아니라, 이 세상에 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가짜입니다. 즉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현실의 세상이 아닌 보이지 않는 내면에 내가 존재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객체인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주체인 내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지금까지 (주체인 내가 아니라 객체인)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가짜라고 잘못 알아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감을 통하여 보고 듣고 느끼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보이지 않는 내면에 존재하는 '나'입니다. '내면에 존재하는 나'를 우리는 특별히 '참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무튼 '나'라고 부르든 '참나'라고 부르든 '내면..

깨달음의 서 2024.08.25

'나'란 무엇일까?

우리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나'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얼굴에서 몸통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나'라고 생각합니다. 얼굴에서 몸통을 거쳐 팔다리로 이어지는 물질 형상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며 살아가죠. 그러나 '나'라는 것은 이렇게 우리 눈에 보이는, 오감으로 감각되는 물질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존재로서,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내면에 영원히 존재할 뿐이죠. 그런 자신을 자각한다면 우리는 몸의 늙음이나 죽음에 연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한 얼굴과 몸통을 자신이라 여기지 않는다면, 자기 낯을 내세우고자 하는 자기과시나 자아도취에도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는 인근 지역에 다녀오는 길에 버스터미날 대합실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자기 얼굴과 몸통을 자기 자신으로 여길 것이라는 생..

깨달음의 서 2024.04.21

무아(無我)의 의미

무아(無我)의 의미 따로 떨어진 내가 없다. 전체에서 분리된 내가 없다. 전체와 나는 하나로 존재한다. 즉 전체인 신과 나는 하나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라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얼굴과 몸통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나' 즉 '내면에 있는 나'가 전체 안에서 전체, 또는 신 안에서 신일 따름이다. 그리고 삶의 목적은 행복 추구가 아니라, 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즉 우리가 '신 안의 신' 또는 '내 안의 나'임을 자각하는 기쁨을 맛보는 일이 바로 삶의 목적이다.

깨달음의 서 2024.04.20

대상이 끊어진다는 말

대상이 끊어졌다고 하는 말은, 대상과 멀리 떨어져 있거나 대상과 아예 단절돼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대상과 끊어지려면 역설적이게도, 대상과 하나가 되거나 한몸이 되어야 합니다. 한몸이 되어야 끊어질 수 있는 것이지, 그것과 떨어져 있으면 결코 끊어질 수 없습니다. 나와 떨어져 있는 것이 곧 대상입니다. 반면, 나와 붙어있는 것은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고로 끊어지려면 붙어있어야 하고 붙어있으려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과도, 내가 싫어하는 것과도 우린 붙어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차피 모든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깨달음의 서 2024.03.28

'비이기적'이라는 말의 뜻은?

이기 利己의 반대말은 이타 利他가 아니라 홍익 弘益이다. 흔히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비이기적'이라는 말은 '이타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기와 이타를 포함하는 즉 모두에게 이익되는 마음과 행동을 말한다. 자신 또는 타인이라는 부분적인 대상이 아닌, 나와 남을 포함하는 전체를 생각하고 위하는 홍익인간 의식이 바로 비이기적인 마음 자세이다. 우리는 흔히 이타적인 마음이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지만, 이타란 이기의 다른 면일 뿐이다. 손바닥과 손등일 뿐이며, 결국 같은 마음 내지 자세인 것이다. 진정한 이타란 자신과 타인을 둘이 아닌 하나로 보는 마음 자세이다. 고로 우리는 나를 돌보듯이 남을 돌보아야 하며, 남을 돌보듯이 나를 돌보아야 한다.

깨달음의 서 2024.02.29

전체 안에서 하나

내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든지 또는 내가 어느 나라에 살든지 하나도 자랑스러울 게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끄러울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분리된 개별자가 아니라 전체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몸에 비유한다면 팔을 구성하는 세포와 다리를 구성하는 세포가, 서로 자신의 팔 또는 다리에 대하여 우월의식 또는 열등의식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다같이 세포일 뿐인데 어디 부위에서 생성되어 활동하느냐에 따라 이러한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자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무지의 극치일 뿐입니다. 그보다 더 어리석을 수는 없습니다.

깨달음의 서 2024.02.18

고요히 있으라, 그리고 내가 신임을 알라

'내 안의 나'라는 제목의 책에 나오는 "고요히 있으라, 그리고 내가 신임을 알라."라는 구절에서 '고요히 있으라'는 말은 '신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지 말라'라는 뜻임이 오늘 느낌으로 다가왔다. 우리의 생각과 말 그리고 몸과 마음이 신에서 비롯된 것이며, 나아가 우리의 자유의지조차 신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스스로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신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자신이 가진 능력과 신에 대한 충성심 등등을 신 앞에서 내세우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소심하게 살라는 게 아니라, 내면적으로는 당당하되 외부적으로는 겸손하라는 얘기다. 왜냐? 우리는 개별적인 단독자가 아니라 전체 안에서 단독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전체 안에서 '나'이기 때문에 전체 ..

깨달음의 서 2024.02.06

무상 고 무아 (無常 苦 無我)

무상 고 무아 (無常 苦 無我) 불교 경전에서는 석가모니가 '무상 고 무아'를 설파했다고 합니다. 저는 예전에 '무상'과 '무아'를 설파했다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고'라는 것은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알 수 있는데 이걸 뭐 설파할 게 있느냐고 질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문득, 아래 연결한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이 세상(此岸)이 아닌 저 세상(彼岸)은 '고 苦'가 아닌 '낙 樂'이기에, 이 세상은 일부러 고생스런 세상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고생만이 지속되면 사람들이 견디지 못할 것이므로, 밀물이 있고 썰물이 있는 것처럼 때로는 즐거움도 있는 세상으로 말이죠. https://youtu.be/Q6IMcVWkVUg (참고로 예전에 올렸던 글을 복사해서 여기 다시 ..

깨달음의 서 2023.07.02

무아 無我

무아 無我 오늘 문득 내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바로 내려놓음이자 내맡김이라는 생각과 함께. 구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마음에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나란 내 생각 안에 있는 나를 말함이다. 어쩌다가 나를 내려놓고 보니 (즉 나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보니), 그동안 내가 나를 붙들고 있었음이 느껴진다. 이 모든 게 신의 뜻이자 신의 사랑이다. 나의 자유의지가 바로 신의 뜻이요 신의 사랑이니 말이다. 내가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게 신의 뜻이요 신의 사랑이라면 내가 내세울 게 무엇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두려워할 게 무엇일까? 무엇도 나를 내세울 게 없고 무엇도 내가 두려워할 게 없다. 그저 기쁘면 기뻐하고 기쁘지 않으면 기뻐하지 않으면 될 ..

깨달음의 서 2023.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