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194

바보처럼 보이는 신

바보처럼 보이는 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생각은 존재한다.'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나'라는 개념보다는 생각 자체가 더 근원적이며,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에 대한 개념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고로 '생각'이 '나'라는 존재의 한 부분이라기보다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개념이 '생각'의 한 부분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모든 개념은 생각 또는 의식이 존재한 이후에야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리가 아닌 직관으로 자신이 존재함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가능하겠으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논리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위 명제는 첫째, 의식이 없..

깨달음의 서 2021.12.01

없음의 있음

없음의 있음 나라는 건 없음의 있음이다. 없음이기에 있다고도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없는 것도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내가 존재한다는 말. 말장난이 아니라 참으로 깊이 있는 내용이다. 내 안에 무엇인가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그것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 안에 있는 그것이 전부가 되기 때문이다. 더 확장되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버리고 만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들이 더러는, 깨달음도 없고 깨달은 사람도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우리가 늘 갇혀 있음을 경계하려는 뜻에서 하는 말일 뿐, 깨달았다고 해서 내가 없을 수는 없다. 깨달음도 있고 깨닫지 못함도 있으며, 깨달은 사람도 있고 깨닫지 못한 사람도 있다. 다음과 같은 비유가 적절할 것이다. 천동설을 믿다가..

깨달음의 서 2021.11.30

무형의 실상

무형의 실상 우리 눈을 비롯한 오감으로 지각되는 것은, 유형의 실상이 아니라 무형의 허상이다. 유형이 아니라 무형이며, 허상이거나 환영인 것이다. 유형의 실상이 빛 또는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 우리 몸에 있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거쳐 인식되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은 유형의 실상이지만, 우리에게 인식될 때는 무형으로 인식된다. 즉 유형의 실상이 우리 눈에 와닿고 뇌에 담기는 게 아니라, 무형인 빛으로 와닿고 빛에 의한 상으로 바뀌어 담긴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유형으로 인식되는 것은,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착각일 뿐, 우리 의식 안에는 무형의 허상으로 담겨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유형으로 존재하는 실상이다.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마치 환영이거나 허상이었던 것..

깨달음의 서 2021.11.23

'함이 없는 함'이라는 말

'함이 없는 함'이라는 말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함이 없는 함' 즉 '행위자 없는 행위'란 있을 수 없다. 자신이 행위를 했다거나 한다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는 얘기는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기억상실증 환자에게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다만 행위자가 '육체적 나'가 아닌 '영적 나'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는 있음이다. 비록 행위는 몸으로서의 내가 했어도, 행위자는 몸이 아닌 영적 존재로서의 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행위자를 '영적 나'로 상정한다면 '함이 없는 함'이 가능하겠지만, '육체적 나'를 고집한다면 이는 불가능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육체적으로 내가 나를 모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로 '함이 없는 함'이라는 말은, 모든 행위는 '육체적 나'가 아닌 '영적 나..

깨달음의 서 2021.11.20

인간이 사고의 틀을 갖고 있다는 칸트의 이론에 대한 비판

방안에 들어와 갇힌 파리를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방문을 열어준다. 그러나 파리는 계속 창문에 헤딩하고 부딪친다. 파리의 두뇌에는 어두운 방문 쪽이 아닌 밝은 창문 쪽으로 날아가야 해방된다고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구리가 있다. 그의 코앞에 죽은 파리가 있다. 그러나 개구리는 움직이지 않는 파리를 먹지 않는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개구리는 먹지 않고 굶어 죽는다. 개구리의 두뇌에는 움직이는 곤충만 먹이로 인식하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이다. 파리와 개구리는 왜 세상을 그렇게 인식하고 그렇게 이해하고 그런 식으로 엉터리로 볼까? 인간은 파리와 개구리와 다를까? ​철학자 칸트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자세히 밝혔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도 파리와 개구리와 다르..

깨달음의 서 2021.11.20

본질과 실존

본질과 실존 ㅡ 실존은 추론이다 ㅡ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주장처럼 실존은 분명 본질에 앞서지만, 본질을 모르는 상태에서의 실존은 공허할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럽의 중세 시대처럼, 실존을 부정하고 본질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강요하던 시대로 돌아갈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불교에서 주장하는 바처럼, 실존하는 모든 대상을 환영이라거나 허상으로 보는 견해에도 이제는 동의할 수 없다. 사실 실존이란 하나의 추론에 해당한다. 환영이나 허상이 아닌 추론인 것이다. 우리가 실존 또는 존재에 대하여 단지 추론할 수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물자체는 우리가 알 수 없고 다만 사유될 수 있을 뿐이라고 철학자 칸트는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칸트의 물자체가 무슨 뜻일까? 다름 아닌 실존을 다..

깨달음의 서 2021.11.18

지금 여기

지금 여기 날마다 장면이 새롭게 바뀌는 현실이라는 영화.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끊임이 없이 상영되고 있지만, 현재 역시 영원하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 연극 무대 (또는 스크린)이다. 우리의 삶이 끊기지 않는 현실인 것처럼, 우리의 의식(또는 생명) 역시 끊어지지 않는 현재이다. 우리에게 삶과 의식은 영원히 상영되는 영화인 동시에 무대인 셈이다. 어쩌면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곧 지금이자 여기일 수도 있음이다. 영화에 비유하자면, 스크린과 영화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일체형이라고나 할까. 우리가 영화를 볼 때처럼 스크린이라는 게 별도로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마치 홀로그램처럼. 무대나 스크린에 해당하는 우리 의식도 영원하지만, 영화에 해당하는 우리 삶도 영..

깨달음의 서 2021.11.18

깨달음의 소리

깨달음의 소리 생각에서 벗어난다거나 또는 생각을 끊는다는 말을, 우리는 흔히 생각 자체에서 벗어나거나 끊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이는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자각하고 더는 자기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일 뿐, 생각 자체에서 벗어나거나 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신 안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거나, 또는 자신의 주관이나 사상, 믿음 등이 옳다는 생각을 스스로 끊거나 버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주관. 사상. 믿음 등을 없애기는커녕, 자신 스스로 그것을 발견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의문에 대한 해답이란 없다. 진리 또는 깨달음이란 밖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내면에 있는 판단기준인 주관. 사상. 믿음이라는 고정관념을 자각..

깨달음의 서 2021.11.15

신의 사랑 방정식

신의 사랑 방정식 가난과 굶주림, 신체적 또는 정신적 폭력과 전쟁 그리고 지진이나 홍수·태풍과 같은 자연재해로 인하여, 죽거나 다치거나 거처할 곳을 잃는 등의 비극적 상황 앞에서, 선한 이웃인 우리는 신에게 따져 묻는다. "당신은 사랑의 존재라고 하면서 왜 가만히 있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신의 사랑은 거지에게 적선하듯 밥 한 그릇 주는 식이 아니다. 어린 자식에게 날마다 물고기 한 마리 잡아다 주는 아버지가 아니라, 시간이 걸리고 어렵더라도 물고기 잡는 법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스스로 잡는 기쁨을 느끼게 하는 식이다. 그리고 세상에 다 알려진 첫 번째 비밀은, 우리 인간이 물질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영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스스로 움직이는 몸뚱이만을 자신으로 여기기 십상이지만, 우리는 유형의 몸뚱..

깨달음의 서 2021.11.12

나를 위한다는 것

나를 위한다는 것 나는 얼마 전부터 모든 일은 나를 위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아,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이러한 앎이 체화될 수 있도록 나름 노력해왔다. 당시의 깨달음이 적힌 글을 간간이 읽어본다든지, 또는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는 지인과 함께 대화를 나눈다든지 하는 등의. 그런데 여기서 '나'라는 게 무엇이냐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내 몸 (더러는 마음)을 나로 여기곤 한다. 평소에는 몸이라는 게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내 몸이 나라는 동일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도 지난 일 하나가 의식 안에서 떠오르길래, 그 모든 게 나를 위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되새기는데 문득, 여기서 '나'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잠시 돌이켜보니 그 모든 ..

깨달음의 서 2021.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