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194

현존

현존 우리는 시간을 말할 때 흔히 과거 현재 미래를 얘기한다. 그런데 이중 현재는 언제일까?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쉽사리 알 듯한데, 현재라는 순간은 인식할 틈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현재란 인식할 수조차 없는 게 아니라, 모든 시간은 언제나 현재라는 순간일 뿐이다. 기다란 선처럼 인식되는 시간 속에서 눈 깜빡할 찰나가 아닌 전체가 바로 현재이며, 동시에 과거와 미래라는 것 역시 현재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아닌 때가 없음에도 지금까지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했기에, 현재를 인식하기가 이처럼 어려웠던 것이다. 과거란 지나간 현재이며 미래 역시 다가올 현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깨닫고 나면 외국의 영성가가 얘기하는 현..

깨달음의 서 2021.11.11

인간으로서의 나와 신으로서의 나

인간으로서의 나와 신으로서의 나 인간 영혼이 곧 신이며 또한 우리 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인간의 몸은 저마다 신의 화현 化現이다. 고로 우리가 몸을 통해 어떤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을 하는 것은, 곧 신이 행하는 것인 셈이다. 우리가 몸으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고 언어로 멋진 글을 쓰며 참으로 훌륭한 생각을 한다고 할지라도, 이 모두는 '나'라는 몸을 통한 영혼 즉 신의 작품일 뿐이다. 반대로 아무리 비천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이 역시 신이 행한 것이다. 결국 '나'라는 것은 없는 동시에 신이 '나'라는 형식으로, 즉 몸과 마음과 영혼의 삼위일체라는 형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가 곧 신의 현현 顯現이다. 즉 인간으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지만, 신으로서의 나는..

깨달음의 서 2021.11.11

단지불회 시즉견성

단지불회 시즉견성 보조 지눌 선사의 수심결에 ‘단지불회 시즉견성(但知不會 是卽見性)’이라는 구절이 있다. 다만 알지 못하는 줄 알면 그게 곧 견성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견성의 문턱일 뿐이다. 견성 이후 깨달음이 깊어지다 보면 문득 '단지불회' 즉 '알지 못하는 줄 안다'는 인식조차 내려놓아야 함을 깨닫게 된다. 내가 주장할 게 하나도 없어야 한다. 이게 바로 불교에 말하는 내려놓음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맡김이다. 불교 반야심경에 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라는 내용의 구절이 있다. 알지 못하는 줄 아는 것도 하나의 견해 아니겠는가? 어떠한 것도 내가 답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곧 답이 아니다. 깨달음에 관한 의문에 대한 답은, 우리의 지식이나 기억에서 얻어..

깨달음의 서 2021.11.10

내가 답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답이 아니다

내가 답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답이 아니다 어떠한 것도 내가 답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답이 아니다. 고로 이것이다 또는 저것이다가 아니며, 이것과 저것 모두 답이라거나 또는 모두 답이 아니다도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런 능력도 없이 신의 은총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물론 그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탁 놔버리면 그때부터 저절로 모든 게 알아지고 또한 모든 게 우리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 영감 靈感을 통해서 말이다. 「모든 것을 버려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얻으리라.」라는 격언처럼,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규정하지 않고 마음으로 의지하고 있는 모든 걸 내려놓으면 모든 게 저절로 알아진다. 내가 스스로 의존할 수 있는 건..

깨달음의 서 2021.11.10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主 而生其心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主 而生其心 이성 理性이란 일상생활에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내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의문에는 오히려 방해꾼일 뿐이다. 무언가 영감이 느껴지기를 기다리고자 하면, 이성이 나서서 해석하고 판단하며 자신이 제시한 해답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성의 판단에 수긍하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성의 판단이 틀린 적보다는 맞는 적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성에 관한 한 이성에 의한 판단이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밑돌 빼서 윗돌 괴는 격이니 결국엔 지었던 집 전체가 무너질 뿐이다. 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내 안에 있는 지식으로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밖에서 새 물 즉 영감이 흘러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새 물을 찾아 밖으로 밖으로 나돈다..

깨달음의 서 2021.11.10

개체로서의 나는 사라져도 전체로서의 나는 영원하다

개체로서의 나는 사라져도 전체로서의 나는 영원하다 나란 없으면서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몸을 가진 유형으로서의 나 즉 개체로서의 나는 때가 되면 사라진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오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나는, 100년 안팎의 시간 동안 존재하는 일시적인 허상 내지 환영일 뿐이다. 이를 가리켜 불교에서는 무아 無我라고 표현한다. 반면 오감과 같은 감각으로는 인식되지 않지만, 느낌으로 인식될 수 있는 나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느낌으로 인식되는 나란 유형이 아니라 무형이며, 또한 개체로서 서로 분리된 부분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존재하는 전체인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처럼. 한마디로 우리는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 속에서 두려움에 떠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우주..

깨달음의 서 2021.11.07

무명 無明과 무아 無我

무명 無明과 무아 無我 무지 또는 무명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감각적인 앎 즉 지각 知覺이 곧 그것이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보이며, 눈에 보이는 자신의 몸뚱아리가 자신인 것처럼 보이는 게 바로 무지요 무명이다. 중세 유럽 로마 교황청의 교황을 비롯한 신부들이,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종교재판에 회부시키고 심지어 화형까지 시켰던 것도 그들의 무지와 무명 때문이었으며, 공중으로 던진 돌이 지상으로 다시 떨어지는 이유가 땅에서 난 것이기 때문이라는, 고대 그리스 현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이 바로 무지와 무명의 소산이다. 이러한 역사적 선례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의 우리조차도, 신체의 감각을 통한 인식 덕분에 우리가 보고 듣고 진리를 알 수 있다며 매우 기뻐하고 고..

깨달음의 서 2021.11.06

자유를 얻는 길

자유를 얻는 길 무 無에 의지하는 게 가능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무란 곧 신 神이기도 하고 절대자이며 전체이기도 하다. 반면 유 有 또는 유형 有形은 언젠가 사라지고 마는 영원하지 않은 부분일 뿐이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옛말이 있지만, 우리에겐 비빌 언덕이 없어야 한다.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말이다. 정신적으로 비빌 언덕이 없을 때 우리는 매우 당황할 수 있지만, 그것마저 놓아버리고 받아들인다면 그때 우리는 자유와 평안이라는 언덕을 만나게 된다. 이게 바로 백척간두 진일보의 뜻이요, 벼랑 끝 나뭇가지에 겨우 매달린 한 손마저 놓으라는 비유이다. 실제로 신체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상상 속에서 그렇게 하라는 얘기다. 서양에서 전..

깨달음의 서 2021.11.05

스스로 존재하는 자

스스로 존재하는 자 우리는 물질적 존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신적 존재도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적잖이 당황하는 분이 있을 것 같네요.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닌 게 뭐가 있단 말인가 하고요. 바로 그것입니다.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닌 게 바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을 나는 무 無라고 일컫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컬어 공 空이라고 합니다만, 공이라는 단어는 무언가가 있다가 지금은 없어지고 공간만이 남아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즉 공이라는 단어는 빈 공간 또는 허공과 똑같은 느낌을 우리에게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래는 있었다가 깨닫게 되면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원래부터 없었던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는 '공'이라는 단어보다는 '없음'이나 '무'라는 단어를 선호합니다. 우리는 '잠깐 동안의 있음'..

깨달음의 서 2021.11.03

애초부터 없었던 나

애초부터 없었던 나 우리는 기억 속의 나를 자기 자신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왕년에 잘 나갔었지."라고 말할 때의 나는 '과거의 나'이며, 또한 그러한 과거의 나를 떠올리는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우리는 '현재의 나'라고 생각합니다만, 현재의 나 역시 기억 속에 있는 나일 뿐입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우리는 기억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나는 '기억 속의 나'가 아니라 기억 자체입니다. 기억 자체, 느낌 자체, 생각 자체가 바로 존재 자체로서의 나입니다. '기억하는 나', '느낌을 느끼는 나', '생각하는 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아나 참나가 아니라 '기억 속의 나'를 말함입니다. 존재 자체를 자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 속의 나'란 관념으로서의 나를 뜻하..

깨달음의 서 2021.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