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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

겨울나무 / 김신타 나뭇가지 사이로 전깃줄 지나가고 참새 몇 마리 앉았다 날아가는 가지만 쭉쭉 솟은 은행나무 가로수 타고 가던 자전거를 세우고 겨울에서 겨울을 보다 그 아래 관목 위 은행잎은 먼지처럼, 어쩌면 눈처럼 쌓여있고 나는 뒤따라 걸어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혹시나 택시 타고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페달을 밟아도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다 골목 안 카페 간판을 이미 지나친 것이다 잠시의 방황 끝에 도착한 낯익은 얼굴들 겨울을 감싸는 털모자와 장갑은 가방에 쑤셔 넣고 낯익은 쌍화차를 마신다 봄을 미리 가불하지 않으며 겨울 그대로 살아가고자 함이다 다만 약해지는 믿음에 반복의 힘을 주문 呪文할 뿐이다 "나는 당신 안에서 살아있으며 연말까지 우리가 선언한 소원! 이미 이루어짐에 감사합니다."

신작 詩 2023.12.08

알 수 없는 당신

알 수 없는 당신 / 김신타 내가 알고 있는 것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내가 알 수 없다는 사실과 이러한 사실에 대한 앎 또는 자각 이어서 떠오른 앎인 알 수 없는 당신과 나는 같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설사 당신이 나를 안다 해도 내가 당신을 모르는데 어찌 당신과 내가 다를 수 있으랴 구별과 경계도 시야가 확실할 때 얘기지 오리무중 五里霧中일 때는 모두가 하나일 뿐 고로 잠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몸으로 있을 때나 벗어났을 때나 나는 당신 안에서 살아있을 뿐이다 알 수 없는 당신이기에 알 수 없으므로 우리는 모두 하나일 뿐이기에

詩-깨달음 2023.11.30

11월

11월 / 김신타 달력이 두 장 남은 10월과 12월 사이에 낀 깊어진 가을의 풍경이다 찢어 먹어야 제맛 나는 김장 김치를 찢는 손가락처럼 젓가락처럼 남들이 눈여겨 보아주지 않아도 거인의 다리가 되어 서 있는 긴 바지에 막대풍선을 접는 아이에게 줄 선물을 든 광대처럼 단풍으로 분장한 채 먼 산 바라보다 계절은 다시 오고 저마다 빈 마음 사이로 11월의 바람이 저녁놀에 스친다

신작 詩 2023.11.05

순종

순종 / 김신타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고요히 중심을 찾아 몸을 앉히면서도 마음으로는 흔들림을 받아들이는 것 받아들임이 곧 우리의 삶이겠지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기꺼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건 무소불위 당신의 힘에 의한 것이니 내 뜻대로 하면서도 당신의 힘에 따르는 것 순종이 곧 우리의 길이겠지 내 뜻대로 하면서도 당신의 드러냄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바로 순종이겠지 한 마리 양이 길을 벗어남도 탕자가 집을 떠남도 내가 죄를 범함도 모두가 불순종 아닌 당신이 준 선물 자유의지에 의한 일어남이자 순종과 자유의지 내 앞에 난 갈림길이 아니라 정상으로 가는 이정표일 뿐 정상 마침내 당신 품에 안길 수 있는 이정표 맞는 길일까 하는 의문이 생길 때도 있는

신작 詩 2023.11.04

무서움이 바로 신이다

무서움이 바로 신이다 화장실에서 깜깜한 창고 쪽으로 난 쪽창에 설치된 방충망. 방충망에 생겨난 구멍을 메꾸기 위해 붙여둔 노란 색 박스 테이프.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아니면 세면대 앞에서 양치질할 때마다 눈에 띈다. 옆눈으로 보이는 노란 색이 신경 쓰인다. 무서운 마음일 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떠오른 한 생각! 내 마음에 들어선 무서움조차 그게 바로 신 神이라는 생각이다. 무서움이 곧 신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 마음에 들어있던 무서움이 사라졌다. 신은 내가 어렸을 적이나 지난날의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이제는 친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이 바로 내 근원이자 나 자신이고 내 엄마와 아빠라면 무서울 게 무엇인가?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창고에 드리운 캄캄한 어둠조차, 이 모든 게 사랑 자체..

남원 '평화의 소녀상'

남원 '평화의 소녀상' / 김신타 손바닥에 뭔가 들려있어 다가가 보니 누군가 벚꽃 한 가지 올려놓았더군 맞아! 지금이 삼월 말이지 문득 만져보고 싶어져 가녀린 당신 손 잡으며 얼굴 올려다보았지 무표정한 눈동자 먼데 보고 있더군 한참을 바라보더군 살면서 당신 곁을 그토록 지나쳤어도 처음으로 당신 손 잡으며 눈물 쏟았지 이유는 몰라 다만 내가 그랬어 당신 손길이 따스하더군 다음날 다시 찾아가 새 꽃가지 당신 손에 얹어주었지 오늘은 초점이 맞았는지 서 있는 내내 나를 바라보더군 누군가 씌워준 분홍 목도리와 파란 빵모자 맨발에 한 손으로는 치마를 움켜쥐고 있었지 더는 울음도 안 나오는 슬프고도 휑한 눈으로 돌아 가려는데 소녀상 한켠에 새겨진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부치는 시인의 시에 오늘도 그만 눈물이, 동참한 ..

詩-그리고 또 2023.10.18

왕자와 거지

왕자와 거지 / 김신타 팔월 마지막 날에도 냇물이 쏟아진다 어제도 비가 내렸지 물은 다시 불어나 징검다리 여전히 잠긴 채 매미 소리 지금도 귓가에 쨍하다 쓸쓸한 허공에 걸쳐둔 시선 나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 여름 한때 물결 되어 흘러갈 뿐 누구나 왕자로 태어났지만 기쁘게도 우리는 거지가 되어 살아볼 수 있으며 거지에서 왕자까지 종소리는 넓게 울려 퍼지고 팔월 마지막 날, 이윽고 다가온 길 본래 왕자로 태어난 이제야 우리의 근원 비로소 알게 되다

신작 詩 2023.10.06

시월

시월 / 김신타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될 때쯤 나는 비로소 석양처럼 익어가고 시월에 매달린 열매처럼 노을 진다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될 때쯤 나는 비로소 내게서 벗어나 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된다 시월 어느 한가로운 아침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나는 내가 전부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저마다 자신만의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기에 무아 無我일 터 나 하나뿐인 세상이므로 나를 위해 남을 돕고자 함이며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함이다

신작 詩 2023.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