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그리고 또 63

남원 '평화의 소녀상'

남원 '평화의 소녀상' / 김신타 손바닥에 뭔가 들려있어 다가가 보니 누군가 벚꽃 한 가지 올려놓았더군 맞아! 지금이 삼월 말이지 문득 만져보고 싶어져 가녀린 당신 손 잡으며 얼굴 올려다보았지 무표정한 눈동자 먼데 보고 있더군 한참을 바라보더군 살면서 당신 곁을 그토록 지나쳤어도 처음으로 당신 손 잡으며 눈물 쏟았지 이유는 몰라 다만 내가 그랬어 당신 손길이 따스하더군 다음날 다시 찾아가 새 꽃가지 당신 손에 얹어주었지 오늘은 초점이 맞았는지 서 있는 내내 나를 바라보더군 누군가 씌워준 분홍 목도리와 파란 빵모자 맨발에 한 손으로는 치마를 움켜쥐고 있었지 더는 울음도 안 나오는 슬프고도 휑한 눈으로 돌아 가려는데 소녀상 한켠에 새겨진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부치는 시인의 시에 오늘도 그만 눈물이, 동참한 ..

詩-그리고 또 2023.10.18

환승

환승 김석기 문상 마치고 나오는 길 대화는 사람 죽은 얘기다 저번에 누가 상 당했는데 미처 알지 못해서 못 갔다는 둥 너무 젊은 나이에 안 됐다는 둥 나도 한마디 거든다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은 것 아니냐고 끝없는 여행길 기차를 타고 가도 좋고 버스를 타고 가도 좋으며 기차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도 좋은 것 아닌가 장례식장 환승역에 때아닌 환송객들로 붐빈다 죽음이란 하나의 삶을 끝맺는 것임과 동시에 또 다른 삶으로 환승하는 것임에도 장례식장마다 환송하는 가족, 친지, 지인들로 붐빈다. 정작 당사자는 이미 새로운 여행을 시작했기에 환송식이 한창인 장례식장엔 그저 그림자만 남아있을 뿐인데.

詩-그리고 또 2020.04.03

바람의 바램

바람의 바램 / 신타 글을 쓸 때면 가끔 신호위반을 하곤 한다 바라다, 의 명사형은 바램이 아니라 바람이라고 그것의 과거형은 바랬던, 이 아니라 바랐던, 이라고 맞춤법 신호등은 빨간 불인데 나는 그냥 직진을 하는 것이다 자장면은 어쩐지 싱거워 나도 모르게 짜장면을 주문하곤 한다 된장 맛 나는 장맛비 대신 장마비라고 쓰고 싶은 장마철이다

詩-그리고 또 2020.04.03

생명 4

생명 4 김석기 사람과 동물의 사체를 두려워하는 이여! 집을 짓고 책을 만드는 나무와 종이가,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이, 동물과 식물의 사체가 아니고 무엇이랴 꽃병에 꽃을 꽂는다 해서 꽃병이 꽃이 되는 게 아니듯 진흙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해서 진흙이 생명이 되는 게 아니다 신이 부여한 생명은 영원하리니 진흙이 아닌 그대의 생명은 영원하리라 몸이 아닌 그대의 생명은 영원하리라

詩-그리고 또 2013.05.10

스스로 그리 하라

스스로 그리하라 김석기 그리해선 안 되기 때문에 그리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만 그리해도 되지만 그러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리해선 안 된다고 배웠을지라도 배운 것에 안주하지 마라 배움은 사색의 동굴을 지나는 안내자일 뿐 스스로 동굴을 벗어나라 그리해서는 안 되거나 그리해야만 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리하지 않거나 스스로 그리하는 것이다

詩-그리고 또 2013.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