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인생이란 자기와의 싸움이며, 모든 건 항상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귀착된다."라는 글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을 글로 적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구절을, "자기를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바꾸어 표현하고 싶습니다. 인생이란 자기와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라는 관념의 울타리 또는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깨달음과의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모든 게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끝나고 내가 우주의 중심인 것 같은 생각, 그리고 내가 없으면 우주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는 게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없다고 생각하면 한편으론 무섭고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자유로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내가 없어진다는 게 '나'라는 상 즉 아상 我相이 없어지는 것일 뿐, 나라는 건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영원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또 어떻게 될까요?
두 번째 깨달음은 우리에게, 첫 번째 깨달음이 가져다주는 내가 없어지면 무엇이 남아 깨닫느냐는 의문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동시에 자기라는 관념의 울타리 또는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해줍니다. 나라는 게 사라진다는 의문이 아닌, 나로부터 벗어나는 커다란 자유로움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이게 바로 깨달음의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어느 시기에 이르면 깨달음을 추구하게 됩니다. 자기 앞에 있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박한 마음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첫 번째 깨달음을 건너뛴 채 두 번째 깨달음으로 바로 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0도에서 180도를 거쳐야만 360도에 도달할 수 있으며, 1층을 지어야만 2층을 지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해서 우리에게 당면한 것은 첫 번째 깨달음입니다.
'나'라는 관념의 울타리 또는 '나'라는 관념의 굴레에서 처음으로 벗어나는, 살아오면서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일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중 첫 번째 단계가 바로 내 몸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내 마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세 번째 단계는 감각과 생각과 느낌으로 인식되는 모든 게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임의 문제입니다. 깨달음이란 앞서 받아들인 여러가지 생각들이, 어느 순간 몸으로 체득되는 듯한 순간을 일컫습니다. 그러한 깨달음의 순간에 우리 저마다 몸에서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데, 나타나는 현상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상을 붙잡으려 하지 말고 이런 신기한 일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흘러가게 내버려두세요.
정작 중요한 것은 이때가 바로 깨달음의 '고속도로 요금소(톨게이트)'를 통과한 것임을 아는 일입니다. 이때부터는 시내에 널려있는 사거리 신호에 따른 교통체증과 같은, 답답함이나 깨달음에 대한 목마름이 더 이상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가 끝인 건 결코 아닙니다. 깨달음에서 끝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요. 앞에서 든 고속도로 비유처럼 요금소를 지났다고 해서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아니니까요. 우리는 끝이 없는 깨달음의 고속도로에서 계속 깨달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라지는 듯한, 텅 빈 공(空) 체험을 첫 번째 깨달음에서 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 見性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견성이란 결코 끝이 아닌 시작일 뿐입니다. 이게 바로 성철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널리 알려진, 중국 당송 시대 청원 유신 선사의 말씀인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구절이 뜻하는 바입니다. 처음에는 산이 산이 아니요 물이 물이 아님을 깨달았으나, 나중에 다시 더 깨닫고 보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는 게 청원 유신 선사가 남긴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 글을 인용한 성철 스님이 돈오돈수를 주장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구절의 원저자인 청원 유신 선사는 깨달음이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얘기를 했는데, 이를 인용한 성철 스님은 깨달음도 닦음도 단박에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했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깨달음에 끝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게 제 소견입니다. 돈오돈수가 아니라 돈오점수이며, 더 나아가 돈오처럼 느껴지는 것일 뿐 사실은 점오이자 점오점수라는 게 제 주장이기도 합니다.
다시 앞으로 가서 글을 이어가겠습니다. 내가 사라지는 듯한, 텅 빈 공(空) 체험 즉 첫 번째 깨달음인 견성 이후에도, 답답함이나 깨달음에 대한 목마름이 사라지는 것일 뿐 모든 의문이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다 보면 평안 속에서도 다시 새로운 의문이 생깁니다. 제 경우에는 이때 책 또는 유튜브 영상이 스승 역할을 했습니다. 스승이 아니라 스승 역할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것들을 통해서 내면에서 새로운 깨달음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나'(조셉 베너 저, 유영일 역)라는 책에 보면, 스승이란 어디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면에 있는 '참나'라고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처럼 초견성 이후 밖에 있는 책이나 유튜브를 봄으로써 그것이 제게 새로운 깨달음의 계기가 된 것은 맞지만, 정작 깨달음은 저의 내면에서 나왔습니다. 특히 유튜브에서 얘기하는 선각자의 말씀과는 상반되는 내용의 깨달음이었기에, 내면에 있는 '참나'가 스승이라는 '내 안의 나'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저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첫 번째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속 관념의 울타리 또는 굴레를 벗어날 수 있게 해줍니다. 자유로움이 느껴지고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매우 좋아집니다. 요즘 표현으로는 기분이 업된다고 하죠. 이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업된 기분도 정상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또한 새로운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깨달았으므로 모르는 게 없어야 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돈오돈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깨달음이 계속 이어지는 점오점수인 것입니다. 그중 한 번씩 일어나는 큰 깨달음이 돈오처럼 느껴질 수는 있습니다만, 돈오 후에도 새로운 깨달음이 또 이어지기 때문에 점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오냐 점오냐, 돈수냐 점수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작 중요한 것은 크든 작든 깨달음이란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깨달음이 없다면, 그러한 깨달음은 고인 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견성 이후에도 새로운 깨달음이 이어진다는 건,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돈오돈수? 견성성불?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심지어 석가모니조차도 평생을 깨달아 나갔습니다. 어디 밖에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 말입니다. 내면에 있는 스승 즉 '참나'의 말씀에 따라 계속해서 깨달아 나간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처음 깨닫고 나서, 자신의 깨달음을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가르침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범천(브라흐마) 또는 제석천이 나타나 세상으로 나아가 전파할 것을 권청(勸請)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범천이나 제석천이 다름 아닌, 내면에 있는 스승 즉 '참나'에 힌두교식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첫 번째 깨달음 이후에, 우리는 두 번째 깨달음의 길로 가게 됩니다. 사실 지나고 보았을 때 첫 번째가 있고 두 번째가 있는 것이지, 깨달을 당시에는 그냥 하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일 뿐입니다. 답답함이나 깨달음에 대한 목마름이 없는 상태에서, 내면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의문을 풀고자 앞으로 계속 가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제 경우에는 책과 유튜브가 스승 역할을 했습니다. 어딘가 또는 누군가를 찾아가 배운 적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첫 번째 깨달음 이후에 깨달은 누군가를 찾아가, 내가 깨달은 게 맞는지를 확인받고 싶은 생각이 든 적도 있었지만 결국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대략 6개월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내가 깨달았음이 스스로 인정되었습니다. 그 뒤로 다시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두 번째 깨달음이 있었으며, 6년 전 깨달음이란 초견성인 첫 번째 깨달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첫 번째 깨달음에서의 무아와 두 번째 깨달음에서의 무아가 말은 같지만 의미가 서로 다릅니다.
첫 번째 깨달음에서의 무아가 나라는 게 없다는 공 체험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두 번째 깨달음에서의 무아는 나 아닌 게 없다는 뜻에서의 무아입니다. 첫 번째에서의 무아를 저는 소승적 무아라고 이름 붙였으며, 두 번째에서의 무아를 대승적 무아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소승적 무아가 나라는 게 없다는 즉 몸을 비롯한 보이는 모든 건 내가 아니라는 깨달음이라면, 대승적 무아는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어떤 것도 내가 아닐 수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즉 내가 아닌 게 없으므로 특별히 나라고 할 게 없다는 깨달음을, 대승적 무아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첫 번째 깨달음을 통해 마음속 울타리나 굴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습니다. 혼자만의 세상에서 얼마든지 혼자만의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애초부터 사회적 동물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을 비롯한 다른 동식물과 함께할 때, 심지어는 광물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존재와 함께할 때 우리는 더 큰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또한 나조차 없이 모든 게 공하다면 무엇이 남아 깨닫느냐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데, 이러한 의문 등이 두 번째 깨달음을 낳습니다. 화두처럼 내면에 간직한 채 책을 읽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또는 좌선을 하거나 산책을 하다 보면, 새로운 깨달음이 하나씩 떠올라 내 안에 쌓이게 됩니다.
이렇게 쌓인 깨달음이 어느 날 커다란 쓰나미처럼 또 하나의 깨달음으로 다가옵니다. 그때가 바로 두 번째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두 번째 깨달음은 첫 번째 깨달음과는 달리 그리 요란스럽지 않습니다. 조용한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첫 번째 깨달음이, 보이는 몸을 비롯한 모든 게 내가 아니라는 무아였다라고 하면, 두 번째 깨달음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걸 포함한 모든 게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게 나이므로 특정한 어느 하나가 나일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무아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이란 자기와의 싸움이 아니라, 깨달음과의 싸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소소한 행복이 아닌 진정한 행복 또는 진정한 마음의 평안이란, 깨달음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이란 결코 쉬운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 척이나 되는 높이에서 허공에 발을 내딛는 일도 아니며, 절벽에서 간신히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는 두 손을 모두 놓는 일도,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내리는 무모한 일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씩 쌓여가던 작은 자각이, 어느 날 거대한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게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이 우리 모두에게 하루빨리 다가와, 지상에서도 천상에서와 같은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인간인 우리끼리 한다면 이룰 수 없는 소망이 되겠지만, 신과 함께한다면 못 이룰 게 없습니다. 우리 모두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신과 함께하는 삶이 되길 바라며, 이쯤에서 긴 글을 끝맺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