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 無我와 연기법 緣起法
몸과 마음과 의식을 비롯한 모든 게 다 신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우리가 무엇을 염려한단 말인가? 모든 게 다 신으로부터 나왔다는 말은, 우리가 신의 품안에 들어있다는 말인 동시에 우리가 곧 신이라는 뜻이기도 한데 무엇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부디 나라는 아상 我相을 없애야 한다. 분리된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집착도 탐욕도 모두 분리된 내가 존재한다는 아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분리된 내가 없음을 즉 무아를 체득한다면 집착할 대상이 무엇이고 탐욕할 대상이 어디 있겠는가?
분리된 내가 없다는 무아를 체득하게 되면, 대상에 대한 집착이 아닌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볼 수 있는 힘이 생기고, 탐욕이 아닌 대상을 즐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무아를 깨닫는다고 해서 모든 추구심과 욕망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지 않으면 이루어지는 게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런 욕망이 없으면 생존 자체도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추구심이나 욕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즉 그러한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무아를 체득함으로써 말이다.
내가 없으면 무엇이 남느냐는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분리된 내가 없어진다는 건 아상이 없어진다는 얘기일 뿐이다. 평생을 나와 함께하는 몸이란 어느 땐가 죽어 없어지지만, 나라는 건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라는 건 신과 마찬가지로 존재 그 자체인데 어찌 태어남이 있고 죽음이 있겠는가? 태어나는 건 내가 아닌, 나와 평생을 함께하는 사랑스러운 몸일 뿐이다.
나라는 건 전체인 신의 부분으로서, 부분과 전체란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우리 몸과 몸의 세포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세포가 곧 몸이고 몸이 곧 세포이지 않은가?
무아란 나라는 게 따로 있지 않고 오직 신만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인류 저마다 나라는 존재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신이(또는 붓다가) 우리 저마다로 현현한 것임을 깨닫는 게 바로 무아라고도 할 수 있다. 즉 나라는 개인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오직 신 하나만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바로 신이고 신이 곧 나인 것이다. 이게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불이법이기도 하다.
그러니 분리된 내가 없는 무아라 할지라도 우리 각자로 현현한 신(또는 붓다)은 영원히 존재하며, 우리 또한 저마다로 나뉘어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므로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아도 된다. 즉 나라는 건 없으면서도 영원한 존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분리된 개인으로서는 영원하지 않지만, (전체인) 신의 부분으로서 나라는 건 영원하기 때문이다.
신과 나라는 건 분리된 둘이 아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법을 강조하고 있음이다. 겉으로는 서로 나누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전체와 부분으로서 모두가 하나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겉으로 보이는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내면적인 앎인 것이다.
아울러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불교의 연기란 우리 몸이 곧 나 자신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한 한낱 방편일 뿐, 그 자체가 연기법이라는 법칙을 설명하기 위한 게 아니다. 우리 몸이 강물처럼 모였다가 흩어지는, 즉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게 바로 연기법의 골자인데, 이는 몸이 내가 아님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일 뿐이지, 연기법이라는 법칙을 설명하기 위한 건 아니라는 게 내 주장의 핵심이다.
현대의 우리를 비롯해 석가모니 생존 당시 사람들 역시 몸을 자기 자신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게 아님을 강물이라는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이지, 우리 몸이 연기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무아라고 설명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몸이 연기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무아라는 설명은 오히려, 우리 몸이 곧 우리 자신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음이다.
석가모니가 우리 몸이 연기적으로 생겨났음을 강물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 이유는, 몸이 곧 자기 자신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몸이라는 존재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님에도 오늘날에는 거꾸로 되어 버렸다. 목적이 수단이 되고 수단이 목적이 되어 버린, 한마디로 전도몽상이 된 것이다.
12연기 등 이른바 연기법이란 무아에 대한 깨달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몸이 곧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게 무아에 대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며, 강물에 대한 비유를 들어 연기적으로 설명한 것은 몸이 곧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임에도, 이제는 방편이 곧 중요한 법칙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연기법 자체가 맞다거나 틀리다는 얘기가 아니라, 연기법이란 석가모니의 무아에 대한 설명이 아닌 비유일 뿐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에는 수단으로서의 비유가 아닌 목적이 되어 버렸다. 우리 몸이 연기적으로 구성된 화합물이라는 얘기는, 강물처럼 모였다가 흘러가 버리는 덧없는 것이라는 비유일 뿐 그 자체가 무아에 대한 설명일 수는 없다.
무아라는 건, 물리적으로 언젠가는 우리 몸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아상이 없는 상태가 무아인 것이지, 언젠가는 몸이 죽어 없어지므로 무아라고 한 게 아니다. 우리 몸이 연기적으로 생겨난 것과 무아라는 건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즉 우리 몸이 연기적인 화합물이기 때문에 무아인 게 아니라는 말이다. 무아란 우리 몸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아상이 없어지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이 글을 맺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