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어 맡김과 집착(붙잡음)
모든 건 신 또는 하늘에 내어 맡겨야 함에도, 우리는 그리 하지 못하고 스스로 해결하려고 든다. 그러다가 막상 어려운 일이 닥치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겨지는 존재나 사물 등, 무언가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한다. 이처럼 우리는 자기가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존재나 다른 사물에 의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존재나 사물을 100% 믿지도 못한다.
우리가 의지하는 존재는 대부분, 종교에서 말하는 신(부처)이거나 하늘이다. 아니면 돈이나 권력 등 현실적인 의지 대상이거나.
그런데 종교에서는 그 모든 걸 내려놓으라거나 내맡기라고 가르친다. 불교의 내려놓음과 기독교의 내맡김이 그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모순된 것은, 신적 존재에게 의지는 하면서도 모든 걸 내어 맡기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이왕 줄려면 홀딱 벗고 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우리는 신적 존재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지 못하는 것이다. 신이나 부처를 믿고자 하면서도, 100% 완전히 믿지는 못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믿으려면 완전히 믿고, 믿지 않으려면 완전히 믿지 않아야 한다. 어중간히 믿어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된다. 기독교에서 추앙하는 사도 바울처럼, 예수를 잡아 죽이고자 할 때는 또 열심히 잡으러 다니고, 생각이 바뀌어 예수의 사상을 전파하고자 할 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려면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아니면 사도 바울처럼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를 만나는 기적과도 같은 일을 겪든지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 기적과 같은 일을 겪는 건 자신의 의지에 달린 일이 아니므로 말이다. 그러나 말이 쉽지 깨달음이라는 것도 그리 만만치가 않다.
나라는 것을 즉 아상을 죽여 없애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라는 걸 죽여 없앨 수 있다면 즉 무아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자신의 모든 걸 내맡기기거나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몸·마음과 늘 함께하는 아상'을 죽여 없앨 수만 있다면, 신이나 부처에게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게 무에 어렵겠는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우리 자기 자신을 완전히 믿지도 못하고, 마찬가지로 신적 존재를 완전히 믿지도 못한다. 자기 자신과 신적 존재 사이에서 적당히 줄타기를 하고 있음이다. 평소에는 자신을 믿고 의지했다가, 무언가 어려운 일이 닥치면 다시 신적 존재를 찾아 의지하는.
그러나 이 둘이 나누어진 무엇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는다면 어떻게 될까? 자기 자신과 신적 존재가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면 말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언제나 신적 존재가 함께한다. 눈 감으면 떠오르는 바로 거기가 내면인데, 시간도 공간도 없는 거기에 신적 존재가 우리와 함께하며, 진정한 우리 자신인 참자아(또는 참나) 또한 내면에 존재하고 있음이다. 외부 세상에 보이는 몸은, 하나의 대상에 불과할 뿐 주체로서의 내가 아니다. 진정한 나를 대신하는 하나의 이름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저마다 얼굴이라는 이름표, 옷이라는 이름표, 몸매라는 이름표, 또는 개성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다닌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는 이름표를 자기라 믿으며, 이름표를 때로는 자랑스럽게 때로는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보이지 않는 내면에 있을 뿐,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외부 모습이 나인 것은 아니다. 내면에 있는 나라는 존재는 대상이 아닌 주체이며, 겉으로 드러나는 이름표가 아닌 드러나지 않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실재인 참자아(참나)가 신적 존재와 함께 내면에 있으며, 이 둘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이다. 우리 몸에 있는 세포와 몸 자신이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인 것처럼.
그러니 참나와 신적 존재가 하나임을 깨달아, 둘 사이를 적당히 줄타기할 게 아니라, 신적 존재에게 100% 의지하여야 할 것이다.
신적 존재가 곧 참나이므로.
겉으로 보이는 '나'라는 건 실재가 아닌 참나의 이름표일 뿐이므로.
우리는 이름표가 닳아 없어지는 것에 불과한, 몸의 죽음을 두고 슬퍼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창 시절 교복에 달린 이름표가 없어졌다고 해서 울고불고 애통해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새로 만들면 되는 일이다. 내면에 실재하는 나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 신적 존재와 언제나 함께하는 영원한 존재이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신적 존재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 애쓸 게 아니라, 신적 존재에게 모든 걸 내어 맡겨야 한다. 밖에 있는 대상을 붙잡고 집착할 게 아니라, 내면에 있는 아상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내려놓음이자 내맡김이다. 우리가 보통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면에 있는 '참나'가 아니라 '아상'일 뿐이다. 몸에 대한 감각적인 상(형상, 이미지)과 마음속에 있는 관념적인 상(개성, 정체성)이 합쳐져 이루어진, 아상을 죽여 없애는 게 바로 내려놓음이자 내맡김이다.
아상을 없앤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로움이 느껴질 뿐이다. 아상이 없어지는 게 곧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이다. 그래서 무아란 이상이 없어지는 것일 뿐, 참나인 내가 없어지는 게 아니다. 아상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신적 존재와 하나인 참나를 믿고 의지할 수 있음이다. 신적 존재와 아상(이를 에고라고도 한다)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사라지고, 신적 존재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서 평안함과 담대함이 함께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