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0 3

단지불회 시즉견성

단지불회 시즉견성 보조 지눌 선사의 수심결에 ‘단지불회 시즉견성(但知不會 是卽見性)’이라는 구절이 있다. 다만 알지 못하는 줄 알면 그게 곧 견성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견성의 문턱일 뿐이다. 견성 이후 깨달음이 깊어지다 보면 문득 '단지불회' 즉 '알지 못하는 줄 안다'는 인식조차 내려놓아야 함을 깨닫게 된다. 내가 주장할 게 하나도 없어야 한다. 이게 바로 불교에 말하는 내려놓음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맡김이다. 불교 반야심경에 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라는 내용의 구절이 있다. 알지 못하는 줄 아는 것도 하나의 견해 아니겠는가? 어떠한 것도 내가 답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곧 답이 아니다. 깨달음에 관한 의문에 대한 답은, 우리의 지식이나 기억에서 얻어..

깨달음의 서 2021.11.10

내가 답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답이 아니다

내가 답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답이 아니다 어떠한 것도 내가 답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답이 아니다. 고로 이것이다 또는 저것이다가 아니며, 이것과 저것 모두 답이라거나 또는 모두 답이 아니다도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런 능력도 없이 신의 은총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물론 그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탁 놔버리면 그때부터 저절로 모든 게 알아지고 또한 모든 게 우리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 영감 靈感을 통해서 말이다. 「모든 것을 버려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얻으리라.」라는 격언처럼,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규정하지 않고 마음으로 의지하고 있는 모든 걸 내려놓으면 모든 게 저절로 알아진다. 내가 스스로 의존할 수 있는 건..

깨달음의 서 2021.11.10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主 而生其心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主 而生其心 이성 理性이란 일상생활에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내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의문에는 오히려 방해꾼일 뿐이다. 무언가 영감이 느껴지기를 기다리고자 하면, 이성이 나서서 해석하고 판단하며 자신이 제시한 해답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성의 판단에 수긍하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성의 판단이 틀린 적보다는 맞는 적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성에 관한 한 이성에 의한 판단이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밑돌 빼서 윗돌 괴는 격이니 결국엔 지었던 집 전체가 무너질 뿐이다. 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내 안에 있는 지식으로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밖에서 새 물 즉 영감이 흘러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새 물을 찾아 밖으로 밖으로 나돈다..

깨달음의 서 2021.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