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심
분별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또는 전체이자 절대인 동시에 유일한 존재인 신에게 내맡겨야 한다. 분별심이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경전인 창세기에 나오는 것처럼, 선악과를 따먹은 잘못된 행위의 결과일 따름이다. 선과 악으로 나누고 옳고 그름으로 분별하는 것은, 권장해야 할 행동이 아니라 원죄를 더 심화시키는 잘못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인 우리가 분별하는 것은 기껏해야 죄를 더 쌓는 일일 뿐이라는 말이다. 누구를 불문하고 우리는 자신의 주관적 잣대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객관이란, 우리 저마다의 주관 속에서 객관일 뿐이다. 주관을 벗어난 객관이란 있을 수 없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적 존재 앞에 분별심을 내려놓거나 내맡겨야 하는 것이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사회에 있었던 인신 공양 등 샤머니즘이나,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 세력인 교황청에 의한 반인륜적 전횡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자. 그들도 당시엔 자신의 판단이 객관적 정의이자 신의 뜻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교황청의 무자비한 폭력과, 예루살렘이라는 성지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종교전쟁을 일으켜, 무수한 사람들을 사망의 골짜기로 몰아넣은 역사를 되돌아보라.
이 모든 일은 자신들의 행동이 객관적이며 진리라는 착각 속에서 이루어졌음이다. 지구상에 누구도 악한 사람은 없다. 다만 일어난 일 또는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이 자신에게 유리하냐 아니냐에 따라 판단이 갈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분별심을 버렸을 때 우리 사회는 어떻게 달라질까? 선악과를 따먹은 잘못된 행위로 인해 얻게 된 분별심이 사라진다면, 우리 인류는 과연 어떻게 변하게 될까를 한번 생각해 보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갈라치기 하는 일 없이, 모든 존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처럼 벌거벗고 있어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영장류라고 하는 원숭이나 사람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개나 고양이를 살펴보라. 생식기이자 대소변을 배출하는 곳인 성기를 가리는 종족은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다. 이는 다른 동물에 비해서 인간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창세기에 나오는 바대로 선악과를 따먹은 잘못된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그때부터 벌거벗었음을 알고는, 그러한 자기 모습이 부끄러워 숨었다는 창세기 내용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라.
또한 중국 수나라 시대 선불교의 3대 조사인 승찬 대사가 쓴 신심명(信心銘) 첫 구절을 보라.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간택 즉 골라서 선택하지만 않는다면, 도에 이르는 건 어렵지 않다."라는 뜻으로, 여기에서도 분별심을 버릴 것을 강조한다. 선과 악을 가리거나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을 때, 깨달음을 얻는다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제는 분별심이다. 창세기 내용을 믿는 종교인들조차 분별심을 낳는 선악과를 따먹은 행동이 원죄라고 하면서도, 비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원죄에 의한 분별심을 더 키우고자 애를 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성 또는 지성이란, 다른 동물과 비교해서 인간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거꾸로 고통의 씨앗일 뿐이다.
다만 고통을 느껴봐야 행복을 느낄 수 있으며 두려움이 있어야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 얻은 분별심을 원축복이라고 표현한 '신과 나눈 이야기' 책 내용에도 동의할 수는 있겠다.
아무튼 이쯤에서 우리는 분별심을 스스로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원죄든 원축복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나이가 들어 삶이 원숙해진 노년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제는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분별하려 들게 아니라, 신(붓다)에게 맡기는 방법을 배우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조차도, 신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내면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 즉, 영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고통을 낳을 뿐인 우리 인간의 분별심 대신에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