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 58

무형의 실상

무형의 실상 우리 눈을 비롯한 오감으로 지각되는 것은, 유형의 실상이 아니라 무형의 허상이다. 유형이 아니라 무형이며, 허상이거나 환영인 것이다. 유형의 실상이 빛 또는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 우리 몸에 있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거쳐 인식되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은 유형의 실상이지만, 우리에게 인식될 때는 무형으로 인식된다. 즉 유형의 실상이 우리 눈에 와닿고 뇌에 담기는 게 아니라, 무형인 빛으로 와닿고 빛에 의한 상으로 바뀌어 담긴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유형으로 인식되는 것은,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착각일 뿐, 우리 의식 안에는 무형의 허상으로 담겨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유형으로 존재하는 실상이다.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마치 환영이거나 허상이었던 것..

깨달음의 서 2021.11.23

가을의 진폭

가을의 진폭 신타 산들바람으로 시작되는 시월 초순의 가을에서부터 찬 바람 불고 거리마다 낙엽 흩어지는 11월의 하순까지 가을은 추 달린 시계처럼 흔들린다 때로는 봄날이었다가 때로는 겨울 같기도 한 가을이 단풍처럼 물들고 노을이 땅거미 지듯 하나둘씩 낙엽 쌓여갈 때 우리는 쓸쓸함에 흔들린다 출근하는 아침 시간 아스팔트길마다 낙엽들 무리 지어 흩날리는 날이면 지난날의 겨울 떠올리며 힘겨웠던 날들에 대한 기억 옷깃 여미고 종종걸음이 된다 여름의 뒤끝에서 겨울의 초입까지 흔들리는 가을의 진폭은 내 마음의 진폭이기도 하다 평안함에서 불안함까지 사랑에서 두려움까지

신작 詩 2021.11.22

바탕

바탕 신타 사회적으로는 뼈대 있는 집안이 자랑이며 근본과 바탕이 있어야 하겠지만 내가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붓다의 고행이라도 마다 않겠다면 뼈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근본과 바탕이 무너져야 한다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대 정녕 알고 싶다면 근본도 바탕도 아니며 근본 바탕은 더더욱 아닌 언어 또는 생각 너머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는 한계가 없기에 언어와 생각에 담기지 않음이다 비록 손톱만 한 것에라도 그대 의지하고자 한다면 손톱이 바로 그대일 뿐이다 우리가 실존한다는 건 감각에 의한 인식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실존한다는 인식에는 감각이 바탕에 깔려있음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음이다 아무런 의지처 없고 마음에 비빌 언덕 없을 때 비로소 각자 覺者가 될 수 있다 모든 감각적 실존에서 벗어났을 때 그대..

詩-깨달음 2021.11.22

단풍나무 아래서

단풍나무 아래서 신타 불타는 기운 받아 겨울 추위조차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뜨겁지 않아도 타오르는 듯한 빛 늦가을 단풍나무 아래 샘솟는 기운 푸른 봄부터 여름까지 스스로 불태웠던 열정과 번민 노을이 물든 고요해진 단풍나무 마지막 결단이 낙엽 진다 하릴없이 떨어질 것인가 기꺼이 내려놓을 것인가 단풍나무 아래서 여전히 겨울을 생각하고 있는 나 아직도 내려놓음과 내맡김 그 앞에서 흔들리고 있음이다

신작 詩 2021.11.21

나를 이루는 것들

나를 이루는 것들 신타 내 인생에 어느 한 가지 누구 한 사람이라도 빠졌다면 지금의 나는 애시당초 없었다 사랑과 미움, 수용과 질투 담대함과 두려움 중에서 단 하나라도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없다 물론 나는 지금의 나도 지금과 다른 나도 받아들인다 그 모두가 나일 뿐이다 내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 모두가 내 안에서 나를 이루고 있음이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도 내가 싫어했던 사람도 그러했던 나 자신조차도 지금 여기 나를 있게 하는 모두가 나의 스승일 뿐이다

詩-깨달음 2021.11.21

이 빠진 동그라미

이 빠진 동그라미 / 신타 빛은 어둠조차 끌어안습니다 그러하기에 한낮에도 그림자가 있고 등잔 밑이 어둡습니다 완벽이란 아무런 흠이 없는 동그란 원이라고 생각했던 애써 찾던 조각을 만났을 때 입이 닫혀 말을 못 하게 되자 살그머니 내려놓고는 다시금 길 떠납니다 완벽만의 완벽이란 입이 닫힌 동그라미일 뿐 완벽하지 못함이 빠졌다면 그건 완벽이 아니지 않은가요 우리는 완벽을 꿈꾸면서도 이 빠진 동그라미가 곧 완벽임을 깨닫지는 못합니다 완벽하지 못함과 완벽이 하나로 어우러진 오늘의 삶이 바로 완벽이며 지금이라는 마루금에서 또 다른 마루금으로 향하는 여정임을

신작 詩 2021.11.20

산행 마친 뒤

산행 마친 뒤 신타 평소 같으면 운동 삼아서 걷고 다이어트 겸 건너뛰어도 되지만 오늘은 산행 끝나는 지점에서 혼자 점심 먹을 계획 세웠는데 저만치 식당 앞에 두고서야 지갑 놓고 온 사실 알게 되었다 주변 지인한테 연락해도 차편을 구할 길 없어 터벅터벅 걷는 발걸음 배도 고프고 발바닥도 아프다 낙엽 지는 가을 때문도 아닌 쓸쓸함이 슬며시 동행한다 중국집 앞 지나갈 때도 돈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짜장면 냄새가 다르다더니 내 발걸음이 지금 그렇다 맨발로도 올 임은 몸이 멀고 지인은 마음이 먼 토요일 오후

신작 詩 2021.11.20

인간이 사고의 틀을 갖고 있다는 칸트의 이론에 대한 비판

방안에 들어와 갇힌 파리를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방문을 열어준다. 그러나 파리는 계속 창문에 헤딩하고 부딪친다. 파리의 두뇌에는 어두운 방문 쪽이 아닌 밝은 창문 쪽으로 날아가야 해방된다고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구리가 있다. 그의 코앞에 죽은 파리가 있다. 그러나 개구리는 움직이지 않는 파리를 먹지 않는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개구리는 먹지 않고 굶어 죽는다. 개구리의 두뇌에는 움직이는 곤충만 먹이로 인식하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이다. 파리와 개구리는 왜 세상을 그렇게 인식하고 그렇게 이해하고 그런 식으로 엉터리로 볼까? 인간은 파리와 개구리와 다를까? ​철학자 칸트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자세히 밝혔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도 파리와 개구리와 다르..

깨달음의 서 2021.11.20

요양병원

요양병원 신타 평소 안 가겠다 되뇌시더니 결국 요양병원에서 나오신 어머니 유치원 데려간 첫날 떨어지지 않으려 울던 딸아이 같다 요양병원이 없던 시절, 부부 외출할 때나 출근할 때 문간방 안쪽 문고리에 아기 되어 버린 어머니 손목 묶어두고 나갔다가 빈집에 갇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돌아와 문 앞에서 수많은 가슴 쓸어내렸다는 어느 시인은 시로써 제 마음을 위로한다 하루 종일 이 세상을 혼자 견딘 빨갛게 부어 있는 손목 매듭 풀며 자장가 불러드렸단다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자장자장 우리 아가* 멀리 떨어져 산다는 핑계로 어머니 근황도 잊고 지내다가 위독하시니 와보라는 전화에 황망히 달려간 어느 늦은 밤 산소호흡기는 입안에 꽂혀있고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으시다 못난 아들 왔다며 손 잡아 드리니 손가락에 의식 남아..

신작 詩 2021.11.19

진보와 보수

진보와 보수 / 김신타 노무현을 사랑하는 이여 대한민국 보수를 미워하지 마소서 그들도 한때 열혈 진보였으나 점점 가진 것과 지킬 게 많다 보니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일 뿐 그들도 대한민국을 아끼는 애국자이자 민주시민입니다 박정희를 사랑하는 이여 대한민국 진보를 미워하지 마소서 우리는 누구나 한때 혁명을 꿈꾸는 투사였지만 머리칼 희끗희끗해지고 이마에 주름살 늘어가면서 보수를 향하는 것 아니겠소 노무현도 한때 보수의 아이콘으로 살아갔으며 박정희도 한때 혁명을 꿈꾸고 실천하지 않았나요 우리 가슴에는 보수와 진보 어느 한 편만이 아닌 두 가지 모두 담겨있습니다 제각기 처한 입장과 어느 쪽이 이익이 되느냐에 따라 선택을 달리 하는 것일 뿐 우리는 진보도 보수도 아닌 그저 힘없는 인간일 뿐입니다 배고픔과 무명에서 벗..

신작 詩 2021.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