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 58

나를 위한다는 것

나를 위한다는 것 나는 얼마 전부터 모든 일은 나를 위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아,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이러한 앎이 체화될 수 있도록 나름 노력해왔다. 당시의 깨달음이 적힌 글을 간간이 읽어본다든지, 또는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는 지인과 함께 대화를 나눈다든지 하는 등의. 그런데 여기서 '나'라는 게 무엇이냐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내 몸 (더러는 마음)을 나로 여기곤 한다. 평소에는 몸이라는 게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내 몸이 나라는 동일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도 지난 일 하나가 의식 안에서 떠오르길래, 그 모든 게 나를 위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되새기는데 문득, 여기서 '나'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잠시 돌이켜보니 그 모든 ..

깨달음의 서 2021.11.11

현존

현존 우리는 시간을 말할 때 흔히 과거 현재 미래를 얘기한다. 그런데 이중 현재는 언제일까?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쉽사리 알 듯한데, 현재라는 순간은 인식할 틈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현재란 인식할 수조차 없는 게 아니라, 모든 시간은 언제나 현재라는 순간일 뿐이다. 기다란 선처럼 인식되는 시간 속에서 눈 깜빡할 찰나가 아닌 전체가 바로 현재이며, 동시에 과거와 미래라는 것 역시 현재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아닌 때가 없음에도 지금까지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했기에, 현재를 인식하기가 이처럼 어려웠던 것이다. 과거란 지나간 현재이며 미래 역시 다가올 현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깨닫고 나면 외국의 영성가가 얘기하는 현..

깨달음의 서 2021.11.11

인간으로서의 나와 신으로서의 나

인간으로서의 나와 신으로서의 나 인간 영혼이 곧 신이며 또한 우리 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인간의 몸은 저마다 신의 화현 化現이다. 고로 우리가 몸을 통해 어떤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을 하는 것은, 곧 신이 행하는 것인 셈이다. 우리가 몸으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고 언어로 멋진 글을 쓰며 참으로 훌륭한 생각을 한다고 할지라도, 이 모두는 '나'라는 몸을 통한 영혼 즉 신의 작품일 뿐이다. 반대로 아무리 비천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이 역시 신이 행한 것이다. 결국 '나'라는 것은 없는 동시에 신이 '나'라는 형식으로, 즉 몸과 마음과 영혼의 삼위일체라는 형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가 곧 신의 현현 顯現이다. 즉 인간으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지만, 신으로서의 나는..

깨달음의 서 2021.11.11

단지불회 시즉견성

단지불회 시즉견성 보조 지눌 선사의 수심결에 ‘단지불회 시즉견성(但知不會 是卽見性)’이라는 구절이 있다. 다만 알지 못하는 줄 알면 그게 곧 견성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견성의 문턱일 뿐이다. 견성 이후 깨달음이 깊어지다 보면 문득 '단지불회' 즉 '알지 못하는 줄 안다'는 인식조차 내려놓아야 함을 깨닫게 된다. 내가 주장할 게 하나도 없어야 한다. 이게 바로 불교에 말하는 내려놓음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맡김이다. 불교 반야심경에 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라는 내용의 구절이 있다. 알지 못하는 줄 아는 것도 하나의 견해 아니겠는가? 어떠한 것도 내가 답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곧 답이 아니다. 깨달음에 관한 의문에 대한 답은, 우리의 지식이나 기억에서 얻어..

깨달음의 서 2021.11.10

내가 답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답이 아니다

내가 답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답이 아니다 어떠한 것도 내가 답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답이 아니다. 고로 이것이다 또는 저것이다가 아니며, 이것과 저것 모두 답이라거나 또는 모두 답이 아니다도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런 능력도 없이 신의 은총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물론 그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탁 놔버리면 그때부터 저절로 모든 게 알아지고 또한 모든 게 우리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 영감 靈感을 통해서 말이다. 「모든 것을 버려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얻으리라.」라는 격언처럼,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규정하지 않고 마음으로 의지하고 있는 모든 걸 내려놓으면 모든 게 저절로 알아진다. 내가 스스로 의존할 수 있는 건..

깨달음의 서 2021.11.10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主 而生其心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主 而生其心 이성 理性이란 일상생활에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내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의문에는 오히려 방해꾼일 뿐이다. 무언가 영감이 느껴지기를 기다리고자 하면, 이성이 나서서 해석하고 판단하며 자신이 제시한 해답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성의 판단에 수긍하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성의 판단이 틀린 적보다는 맞는 적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성에 관한 한 이성에 의한 판단이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밑돌 빼서 윗돌 괴는 격이니 결국엔 지었던 집 전체가 무너질 뿐이다. 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내 안에 있는 지식으로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밖에서 새 물 즉 영감이 흘러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새 물을 찾아 밖으로 밖으로 나돈다..

깨달음의 서 2021.11.10

문답

문답 신타 우리 이렇게 점점 멀어지는 건가요 반말에서 존댓말로 둘만의 호칭에서 사회적 호칭으로 우리 사이 이제 낙엽 되어 흩어지는 건가요 아쉬우면서도 담담한 거부하고 싶으면서도 받아들이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으면서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덩그러니 구름처럼 떠 있는 것 같기도 한 두 갈래 길에서 발길 멈춘 채 꼼짝달싹하기도 힘들지만 괴로울지라도 가야 할 길 발길 닿는 대로 가고 싶어요

신작 詩 2021.11.09

개체로서의 나는 사라져도 전체로서의 나는 영원하다

개체로서의 나는 사라져도 전체로서의 나는 영원하다 나란 없으면서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몸을 가진 유형으로서의 나 즉 개체로서의 나는 때가 되면 사라진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오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나는, 100년 안팎의 시간 동안 존재하는 일시적인 허상 내지 환영일 뿐이다. 이를 가리켜 불교에서는 무아 無我라고 표현한다. 반면 오감과 같은 감각으로는 인식되지 않지만, 느낌으로 인식될 수 있는 나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느낌으로 인식되는 나란 유형이 아니라 무형이며, 또한 개체로서 서로 분리된 부분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존재하는 전체인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처럼. 한마디로 우리는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 속에서 두려움에 떠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우주..

깨달음의 서 2021.11.07